사도행전 6:7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믿기 시작하다!
7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7절에서 드러나는 부흥의 결과는 그 자체도 의미있지만, 다른 관점에서도 중요성을 가진다. 즉, 이전 부흥의 결과는 주로 12사도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면, 7절의 부흥은 일곱일꾼과 더불어 사역한 결과물이라는 점에 있어 주목된다. 더욱이 누가는 이 경우에 있어 특이한 사항으로 ‘많은 제사장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허다한 제사장들이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 왜 중요할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이 시점에서 제사장들이 돌아온다는 사실이 사도행전 전체에 있어 어떤 전환을 가져오는 것일까? 이 질문으로부터 스데반 집사(일반적으로 집사라는 호칭이 통용되기에, 스데반 일꾼 대신에 스데반 집사라고 호칭할까합니다)의 체포, 설교 그리고 죽음을 다루는 본문을 시작하자.
제사장들이 믿기 시작하다.
당시에 제사장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오늘날 목회자가 넘쳐나서 고민하는 것처럼, 상당히 많았다. 물론 당시, 제사장의 역할이 희생제사 집전과 축복의 선포, 성전 음악을 관장함으로 기악과 성악의 연습과 공연, 성전의 질서 유지, 절기의 나팔 불기과 행사 주관, 성전마당과 건물에 대한 유지 보수, 예배자의 형편을 파악하여 적절한 희생제물 정해주는 상담, 성전 금고 운영, 질병조사와 정결의식 수행 그리고 시신이나 신체적 유출과 접촉으로 생긴 문제들에 대한 평가(예수복음서사전 참조)등으로 광범위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제사장 숫자를 유지하는 것은 필요했다. 그렇지만,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예에서 보다시피 그 당시의 제사장 무리가 필요이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일 중요한 사역이랄 수 있는 성전 제사의 참여는 일생에 몇 번 혹은 아주 오랜 주기로 참여할 수 있었다. 사가랴는 아비야 계열의 제사장이었는데 당시 제사장의 수가 너무 많아 그룹별로 나누어 성전봉사를 담당했으며, 그 기간에도 성전의 여러 일들을 제비뽑아 나누었고 그 중에서 성전에 들어가 향을 사르는 일을 맡는 것은 가장 큰 영광이었고 평생 단 한번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한 업무이었다. 사가랴가 바로 이렇게 돌아오기 힘든 업무를 수행하다가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고 하지만 믿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잠시동안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제사장들은 유대 사회 곳곳에서 감초처럼 존재하며 백성들의 삶을 조정 유지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사두개인으로 부유한 제사장들과 정치적 권력과 경제권까지 장악한 제사장 그룹도 있었지만, 대개는 가난한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살아가며 동족의 안위를 염려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렇듯 유대 사회의 중심축을 형성하는 제사장들이 예수의 복음에 관심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12사도의 사역이 유대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된 베드로와 사도들은 더욱더 기도와 말씀을 연구하는 사역에 전념 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양질의 설교와 가르침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더 깊이 있는 말씀의 해석과 도전은 유대교의 전통에 깊이 물들어 있는 사람들마저도 바꾸어놓는 놀라운 사역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어쩌면 제사장들은 40년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방언을 하고 그림자만 밟아도 기적이 일어나는 일들로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힘든 부류라고 할수있다. 그런 신기한 일들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가소로운 마술이나 속임 혹은 실제라 하더라도 별로 가슴에 닿지 않는 야단법석일 뿐이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제일 가까이에서 섬기고 제의를 담당하는 실무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뜻밖에 있어 낯선 경험일 수 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정직하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일들을 담당하며 순종하는 제사장이었지만, 정작 하나님과의 만남에서는 당황하며 믿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어쩌면 너무나 틀에 박힌 정형화된 삶을 살았기 때문일 수 있다. 이런 전통적이며 틀에 정형화된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제사장들이 깨어질 수 있는 것은 진실로 깊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다. 마른땅을 호수되게 하시며 차돌을 변하여 샘물되게 하심을 노래한 시인의 고백처럼, 도무지 미치지 못할 영역의 사람 - 드디어 제사장이 예수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 고백은 마치 오래동안 부모님의 신앙 영접을 위해 애쓰고 기도하다가 마지막 병석에서나마 극적으로 예수를 영접했을때의 그 감격과 기쁨의 울림과 흡사하다.
이를 기점으로 사도행전의 분위기는 일신된다. 즉 유대사회로의 진입과 영향력은 어느정도 무르익고 있다는 신호탄으로써 ‘제사장들도 믿게 되었다’인 것이다. 그러므로 스데반 집사와 빌립 집사 그리고 사울(바울)의 등장과 사역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대상을 향한 복음의 진전을 기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고보면, 7명의 집사가 모두 헬라파 유대인으로 구성된 것이나, 스데반의 순교와 그 자리에 있었던 사울의 등장 그리고 베드로의 선교여행 등을 통하여, 초대교회의 사역과 선교 그리고 바울 사도의 등장과 선교가 순항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전개되는 사도행전의 에피소드는 이제 분명한 전환점을 가진다. 성령행전의 역사가 사도들에 집중되고, 유대사회에 한정된 사역이라고 본다면, 이제 그 무대가 훨씬 넓어지고 다양해지며 복잡해질 것을 예상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사도 바울의 독무대처럼 보이지만, 초대교회와의 연합과 교통이 전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전개될 성령 충만의 양상도 이전과 같이 더욱더 흥미진진하게 드러날 것이다. 기실 어찌보면, 너무 걸출한 사도 바울의 사역 때문에 정작 바울과 동행한 성령의 충만하심이 많이 가리워진 본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정작 사도 바울이 탁월하고 베드로가 우월해서 이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 아님을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어느샌가 사람 바울에게 매료되고 박수를 보내곤 한다.
사울을 바울 삼으신 이는 주님이시다. 바울을 사용하시고 놀라운 열매를 맺어가심은 성령의 열매 일 따름이다. 바울과 우리는 그저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 일 뿐임을 다시금 찬찬히 고백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성령만이 드러나셔야지 바울이 드러나고 위험한 우리가 드러난다면 금새 교만으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다시금 내 삶의 여정이 성령행전 이기를 소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