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송설교 - 이 험한 세상, 주님 없이 어떻게 살라구... <1>
2. 파송설교의 첫번째 메시지(마 10:5b~10) ; 사역의 본질 / 예수님의 옅은 한숨소리
3. 파송설교, 그 두번째 메시지(마 10:11~15) ; 개털모자냐 황금면류관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4. 파송설교, 그 세번째 메시지(마 10:16~23) ;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게...파송설교 <4>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파송설교의 본론이다.
본격적인 주님의 걱정과 당부들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앞의 본문이 다소 원론적이었다면, 지금부터는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사역의 현장 가운데 꼭 기억해야 할 지침과도 같은 말씀들이다.
본문은 먼저 예수님의 근심어린 탄식으로 시작한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상황'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힘없는 양을 배고픈 이리떼 가운데 보낸다는 것은 거의 학살에 가깝다. 방어력이 전혀 없는 양을 육식천적에게 보낸다는 것은 가혹하며 위험천만한 상황이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보내시는 사역과 삶의 현장이 흡사 양을 잡아 먹으려는 이리떼가 가득한 곳으로 표현하심이다.
자식을 물가에 내어보내고서 맘 졸이는 부모의 심정과도 같다는 것이다.
왜일까? 제자들이 가진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제자들이 가진 권능이 예수님의 권능과는 다른 한차원 낮은 레벨의 능력이라서 걱정스럽다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그렇지는 않음을 앞서서 확인했다.
제자들은 순전한 마음으로 헌신했으며, 그들이 받은 능력은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근심어린 맘으로 염려하신다. 아마도 그것은 파송받아 떠나가는 제자들이 맞서야 할 현실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이 부분을 이해하자. -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은 상황'
문자적으로는 그냥 잡혀 찢기우는 죽음의 결과이다.
주님의 어린양떼인 제자들이 이리와 같은 삶의 현장으로 보냄을 받는 상황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역의 현장 가운데서 죽음으로써 순교한다는 의미일까? 그럴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다'는 것은 '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사명을 잃어버리거나 빼앗기는 형국'이라고 정의할수있다.
예수님의 민망해하신 그 마음을 품어 자원하는 심령으로 주님의 권능을 받아 소명자로 출발했지만, 어느 순간엔가 그 어떤 계기로 말미암아 점점 그 열정과 소명의식이 희미해지며 지쳐가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전혀 제자답지 않고, 파송받은 소명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로 삶에 지치고 파묻혀 허우적거리는 그 모습이... 바로 이리에게 잡혀먹힌 죽음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점을 염려하신다.
파송설교의 서론에서 이미 이러한 우려가 제기되었고, 그 결과가 심히 중하기에 걱정하심이 크신것이다.
가룟 유다의 그 변심...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이 임재한 예수님의 제자가 세상 논리에 넘어가 예수를 팔아먹고 후에 자살해버리는 그 끔찍한 결말을...
그러므로 이어지는 말씀은 이리떼와 같은 세상에서 양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예수님의 처방전이다.
보내심을 받은 사명의식, 부르심의 소명을 잃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 파송받은 삶의 현장-고단하거나 힘겹거나 지루하거나 고루한... -에서 방향성을 잃고 헤메거나 안주하지 않을수있는 생존 비법이다.
***
햐~ ^^* 그런데 너무 간단하다... 비법치고는...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기대 잔뜩하다가 이 비법(!)을 보는 순간...드는 느낌- 감기 너무 심해 병원갔는데, '따뜻한 물 마시고 잠 많이 자면 낫습니다 혹은 일주일이면 저절로 낫습니다'는 말 듣고 나오는 느낌... 참 맞는 말이지만, 뭔가 허전한...^^*
주어진 본문(16~23절)을 자세히 읽기!
작은 문단 나누기 & 소제목 달아보기!
그리고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하더라도 눈에 불을 켜고 자세히 관찰하기 & 자꾸 질문하기(관찰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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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나니...!
16절은 이후의 본문을 감싸고 있다.
앞서 언급한것 같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에 대한 주님의 상황 인식은 절박하면서도 명확하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말씀은 절박하고 긴박한 삶의 정황 가운데 주어진 적실한 말씀이다.
이어지는 두개의 작은 문단의 첫부분은 뱀처럼 지혜로움에 대하여... 두번째 부분은 비둘기 같이 순결할것에 대한...
이 두개의 말씀 -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이 말씀대로 움직일때에만, 이리떼와 같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음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다.
앞서도 강조했지만, 열거되는 예수님의 제자 중 극명하게 대비되는 시몬 베드로와 가롯 유다의 그 무시무시한 차이가 바로 이 파송설교의 말씀을 듣고 읽고 지켰는가 지키지 못했는가에서 달려있음을 다시금 확인할때, 이 처방전은 상당한 무게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즉, '이리떼의 상황' 가운데서 죽지 않고 살아남을수있는 비결이 이 말씀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진실로 다른 길은 없다!
분명한 주님의 음성(처방전)은 제쳐두고 정작 우리 짐작대로 임의의 결정을 짜집기하여 들이대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만 한다.
기실 어떤 경우에는 이런 임의의 짜집기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7:26에서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과 같은 경우이다. 이러한 조합의 경우는 지극히 이례적인 경우라 할수있다. 또한 바울 정도는 되야지 고려해볼만한 시도일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발꿈치도 못따라가는 수준이기에 임의의 조작 내지 조합을 포기해야 한다.
유명하다는 누군가의 설교 한자락에서... 혹은 유명한 몇몇 구절들을 임의로 인용하고서는 이것이 말씀이므로 주의 명령이라 속단해서는 곤란하다. 일전에 웃자고 만들었을 법한 이야기 중에 이런것이 있다.
어떤 이가 말씀을 보다가 마태복음 27:5의 "유다가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라는 구절을 보았고, 이어 누가복음 10:37절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는 명령을 받고서는 겁이 나서 주저하며 또 찾은 말씀이 요한복음 13: 27절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이어서 기겁을 했노라는 ...
다른 길은 없다!
우리의 삶에서 주시는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그 방법, 그 정신 그리고 그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 외에는 우리의 정체성을 온전히 지킬 다른 방법이 없음에 대해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한다. 제대로 그렇게 붙들어 보지도 않은채, 너무 쉽게 다른 방법과 길들 - 자칫 그것이 넓은 길; 망하는 길이지 않겠는가!-에서 서성거린다면 "예수와 평생을 함께 했으나 정작 예수와 상관없는 자"로 판명될수 있음-누가 알겠는가!-에 대해 우리의 심령이 주눅들어야 할것이다.
이리떼의 출몰과 같이 하늘이 무너지는 상황 중에도 빠져 나갈 구멍은 있다!
2. 뱀 같이 지혜롭게... - 와서 죽어라!
(17절)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절)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절)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것을 주시리니 (20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예수님께서는 파송받은 제자들에게 명령 하셨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나아갈것을...
그렇다면 17절과 18절에서 언급되어지는 대상은 이미 언급된 대상들의 연장선에 있다.
6절에서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 8절의 병든 사람, 나병환자, 귀신 들린 자, 11절의 어떤 성이나 마을의 합당한 사람 혹은 영접지 않고 말을 듣지 않았던 이들... 그리고 16절~18절에서는 그 대상이 사람들, 공회, 회당, 총독 그리고 임금들...이 그 대상들이다.
자연스럽게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의 범위가 점차로 넓어지고 있음을 확인할수있다. 심지어 이방인까지도 그 범위에 들어가고 있다(18절). 특별히 17절의 사람들은 어떤 처지와 형편, 배경을 가진 사람인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파송받은 제자들에 대해서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렇기때문에 그 사람들이 제자들을 법정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하며 고소당함으로 이방인의 총독과 임금들에게까지 몰리는 상황으로 진전되기 때문이다.
파송받은 제자들이 이런 험악한 꼴을 당하지 않을려면 어떻게해야 할까?
우리가 흔히 하는 말에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하는 표현이 있다. 어쩌면 딱 맞는 말일수있다. 재판에 넘겨지고 회당에서 채찍질 맞아 피부가 뜯겨지고, 그것도 모자라 이방인들 앞에 끌려나가는 볼쌍사나운 처지에 놓임의 가치가 실상 별볼일 없는 것이라면, 그저 그런 사람들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정말이지 무서워 피한다기 보다, 그 돌아가는 상황이 더러워서 피하는 지혜로운 처신이라 하지 않을수없다.
만나기만 하면 괜히 벨이 틀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냥 싫고 거북하고 몸에 맞지않은 옷처럼 성가신 경우가 종종있다.
특히나 어떤 한 사건으로 인해 과거의 좋지 못한 묵은 감정이 있을경우는 더 심각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어떻게 살것인가?
주님이 주시는 평화롭고 단정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더러운 똥을 보는 즉시 피해 버리는 것이 그저 속편하고 합당한 삶이 아닐까? 그것이 지혜로운 것이지 않을까? 그렇지않아도 복잡하고 어려운 세상에서 그나마 대인관계 만이라도 원만하고 좋아야지 살맛이 더해지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이런 달콤한 유혹에 늘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다.
골치아프게 적대적이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부딪치며 괴로워하기 보다, 교회 안에서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려 교제하며 섬기는 것이 훨씬 속편하고 시간도 잘 간다. 모이기를 힘쓰라, 모임을 폐하는 습관을 가진 이들을 본삼지 말고 자주 모일것을 권하는 성경 구절을 들먹이면서 사실 우리는 자주 모이고 있고 믿는 자들과의 익숙한 관계 속에 안주하기를 즐긴다.
믿지 않는 친구들과 만나면 곧잘 베여드는 담배 연기를 연신 요리조리 피해보며, 술먹고 주정부릴때 깨작깨작 안주나 먹고 분위기 억지로 맞추어주듯 좀 있다가 기회를 봐서 뒤로 슬금 빠져나오는 것이 그나마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해나가는 모습이라 자부하기도 한다. 누군가가 이러한 장단에 너무 깊숙히 빠져서 함께 과도하게 어울리며 담배피고 술마시고 음주가무를 즐기며 2차 3차 가기라도 하면, 그때부터 그는 중보기도의 대상자에 올라 무시로 그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게 된다.
파송받은 제자들의 실제 삶은 고단하다.
봉쇄 수도원 같이 세속과 단절된 곳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우리들은 끊임없이 피곤한 노동의 일상과 아이들의 양육, 보모 공양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고단한 현실에서 답답해 하는 것이 우리 모습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고상한 일상은 그저 그림속의 떡이다.
예수님의 파송은 바로 이런 우리네 삶의 현장으로의 부르심이다.
주님은 '이런 삶의 자리에서' 보냄받은 양으로써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이렇게 복잡하고 고단한 일상의 삶 속에서 복음에 적대적이며 하나님의 계획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고, 예수믿는 이들을 개독교, 예수쟁이라며 힐끔거리는 사람들 - 진정 이리떼와 같은 상황 중으로 양과 같은 제자들을 보내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양이 이리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지는 정체성의 상실은 어떤 경우를 의미하는 것일까?
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어 버림과 같이, 이리에게 갈갈이 찍겨져 먹혀버린 죽임당한 양은 어떤 경우일까?
힘겨운 삶의 현실에서 너무나 힘에 겨워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리며 어찌할바를 알지못하는 상황이 죽임당한 양-정체성을 잃어버린 파송받은 제자의 모습일까?
결단코 그렇지 않다.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어쩌면 이렇게 울고 앉은 양은 건강한 양이다. 살아남은 양이다. 주님이 기뻐하시며 안아주시는 어린양이다.
진정 죽임당한 양은 아예 이런 힘겨운 삶의 현실에 부딪혀 볼 엄두도 내지 못하거나 혹은 시도는 나름 열심히 해봤지만 지레짐작 이래서는 될일도 안되겠어!하며 나름대로의 최선의 대안을 만들어 가는 시도들이지 않을까?
예수님은 우리가 뱀처럼 지혜롭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삶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가 없는 곳이 아니라, 뱀처럼 지혜로워야만 살아남을수있는 곳으로 우리를 파송하고 계신다.
뱀처럼 지혜롭기 위해서 고분고투하는 신앙의 자리가 괜히 멋있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피흘린 삶의 현장에서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수많은 이방인들(이리떼 같은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증인이 되는 삶의 자리로 양같은 우리를 이리떼와 같은 살벌한 삶의 현장 가운데 보내시는 것이다.
그러면 진실로 우리가 양이 죽임당하는 것과 같은 정체성을 상실한 제자로 발견된다는 것은 이러한 삶의 자리에서 도망해버린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저 믿는 사람들끼리 있는 것이 훨씬 편하고 안전하니깐... 교회라는 다소 안전한 선한 구조의 울타리 안에서만 열정적으로 믿음 생활할수있지만, 정작 삶의 자리에서는 겨우 견디며 타인과 분리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어쩌면 죽임당한 어린양의 모습이지 않을까!
교회 안에서는 멋진 신앙인같은데 사회 속에서는 거의 백수같은 모습이라면 이것이 파송받은 제자의 정체성을 상실한채, 뱀처럼 지혜로운 삶을 포기한 모습이지 않겠는가!
예수는 뱀처럼 지혜로워야만 살아남을수있는 정글로 우리를 파송하셨다.
그 정글이 너무 무서워 안전한 교회 울타리 내에서만 머물고 만다면, 뱀처럼 지혜로워질 기회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요즘은 인터넷이나 TV를 접하면 너무나 손쉽게 은혜와 능력의 말씀 설교를 들을수있다. 자칭 유명한 분들은 총출동되어 있다.
하루에도 좋고 은혜로운 설교를 몇편씩이나 들을수있다. 어떻게 애쓰지 않아도 은혜로 철철 채워진다. 교회에서도 성도들을 향한 예배 서비스와 양육 프로그램이 얼마나 정교하고 열정적인지... 그 시간만 잊지 않고 참석하면 잘 준비된 말씀들과 정보들이 세련되게 제공된다. 좀 번거러운 숙제만 해가면 크게 염려치 않아도 다음 단계로 나아갈수도 있다.
뱀처럼 지혜로워지기 위해서 뭐 별 노력하지 않아도, 거룩한 성도로 다듬어지고 점점더 좋은 봉사의 기회와 직분이 주어진다.
그렇게 이 땅에는 목사와 장로 권사 집사들이 넘쳐난다. 왠만하면 다 집사요, 권사요 장로다. 목사도 길에 흔하게 부딪힌다. 그런데도 세상은 이 모양이다. 국회에도 법을 만드는 상당한 수의 국회의원이 집사와 장로, 권사이다. 늘 싸운다.
집사와 장로로서 교회와 회사에서의 모습이 너무 다르다. 달라도 그렇게 다를수가 없다. 심지어 욕을 얻어먹기도 한다.
사기꾼 취급받는 집사, 장로, 목사 그리고 권사들이 점점 늘고있다. 교회 내에서의 싸움도 점점 증가일로에 있다. 예전보다 더 치열하게 싸운다. 야비하게 뒤통수치고 세상 법을 들먹인다. 그렇게 고상한 설교말씀을 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던 입술에서 예상치 못했던 욕들과 비방으로 더렵혀지고도 또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지나간다. 다시금 하나됨과 사랑으로 도배된다.
참 이상한 이런 모습이 보냄 받은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적나라한 우리 모습이지 않는가!
무참히 죽임당한 어린양이다...
뱀처럼 지혜로울 것을 소망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떠나버리고 잃어버린 결과이다! 가롯 유다의 안타까운 결과같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뱀처럼 지혜로워만 살아남을수있는 척박한 삶을 의미있게 하신다.
별 열매도 없이 고생고생하는 정글에서 꽤째째하고 듬성듬성 털뽑힌 그러나 용케 죽지 않은 양을 기대하시며 찾으신다.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것 같다시는 주님의 마음이 살아있는 파송받은 제자... 그 기대의 끈을 놓치지 않으며 용케 살아가는 양으로서의 파송받은 제자... 와서 죽어라는 초대에 기꺼이 죽음을 향해 걸아가지만 죽지 않고 버티고 있는 양의 무리들... 어떻게 가능할까?
극히 이질적인 세상의 권력과 위협 그리고 달콤한 유혹들 앞에 주눅들거나 마음을 빼앗기거나 혹은 압도당하지 않음으로 여전히 주님의 양으로 살았고 버틸수있는 비결이 무엇이라고 주님께서는 제시하는가?
[뱀처럼 지혜로움에 대하여...]
예수님은 19절과 20절을 통하여 어떤 삶의 자세가 뱀처럼 지혜로운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신다.
"너희를 넘겨줄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두가지를 말씀하신다. 염려치 말것과 성령을 기대하는 것!
우리의 염려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앞서 산상설교에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의 문제 앞에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것을 당부하신적이 있다.
그러시면서 산상설교에서는 하루치의 염려에 대해서는 허용해주셨다. 하지만 파송설교, 본문에서는 그러한 배려(!)가 발견되지 않는다. 막막하다. 염려하지 않고 한시도 살수없는 연약한 인생을 향하여서... 더구나 이리떼에 들어선것과 같은 암담한 상황 가운데서... 염려하지 말라니!
이해를 위하여 두 본문을 조금 더 살펴보자.
산상설교의 염려하지 말것에 대한 명령은 경제적이면서 지속적인 고통, 비교의식과 같은 고통이 극심한 상황이다. 돈 문제다. 경제적 파탄의 상황이다. 이것이 얼마나 사람을 영적으로 만들어 가는지 주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이에 비해서 파송설교의 염려하지 말것에 대한 당부는 사명을 가진 제자가 정체성을 잃어버릴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주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염려함으로 말미암아 나 자신의 부실함과 부족함에 비참함을 느끼며 어이없게 넘어질수있는 연약한 영성의 소유자임을 잘 알고 계시는 것이다.
산상설교에서 일상의 삶, 그것도 경제적인 궁핍과 돈 문제 앞에 우리가 얼마나 영적으로 민감해져서 우상에게로 그렇게 신속히 옮겨가는지를...
파송설교에서 사명자의 삶, 잘 무장된 듯 보이지만 자칫 한계상황 앞에 우리의 영성이 얼마나 둔감해지는지... 그럼으로 얼마나 신속하게 포기하며 비참함에 어이없이 무너지는지를...
실상 이 두가지 염려는 동일하다. 그러나 양상이 다름으로 주님의 처방은 다르다.
먼저는 '하루치의 염려만으로 제한하는 것/혹은 하루치의 염려만 허용하는 것'으로 치유되거나 회복가능하고, 또 다른 하나는 오직 성령과의 동행, 성령의 충만 혹은 발견으로만 극복할수있음을 말씀하신다.
먼저 산상설교 중의 염려하지 말것에 대한 본문이다.
마태복음 6:24~3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수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하나님의 백성, 소유된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장 중심되는 것은 '누가 그들의 진정한 왕이신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고백의 진실함은 평온하거나 일이 술술 잘 풀리거나 태평한 시절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면 당연하다는 듯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할수있기 때문이다.
실상 이 고백이 진실로 살아있는 진정한 신앙고백으로 확인되기 위해서는 극한 어려운 상황이 전제될때, 확인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어려움 중에서도 가장 극심하고 우리의 영적 기운을 흐트려놓기 가장 쉬운것이 경제적 어려움이다. 질병이나 전쟁, 그밖의 여러 어려움이 많이 있는 중에 경제적 어려움이나 궁핍의 상황은 그렇게 중대한 것 같지 않게 느껴질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을 가장 피폐한 상황으로 몰아가며, 비교의식으로 말미암아 상대적 박탈감이 극대화되고, 우상 숭배에 가장 쉽게 빠져들게 하는 것은 전쟁이나 질병보다 경제적 파산 상황이다.
사사기에서 등장하는 사사들 중에 가장 가운데 중심 사사로 등장하는 이가 기드온이다.
그런데 그 시대가 어떻했는가하면 미디안의 경제적 봉쇄 정책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경제적 궁핍에 처했던 시대였다.
이스라엘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산에 구멍과 굴과 산성을 파고 기어들어가 살았고, 풀이 자랄때면 떼로 올라와 식물을 남겨두지 않고 싹쓸이 당함으로 말미암아 고통이 심하였다고 보고된다(삿 6:1~6).
그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만을 의지할것을 명령하면서 아모리 사람의 신(바알)을 두려워하지 말것을 당부하시지만, 그들은 이 두려움과 부러움 그리고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 바알이 여호와보다 훨씬 더 유능해보이며, 더 권세있어 보였다. 왜냐하면 폭풍우의 신인 바알은 풍요로운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여호와 하나님은 백성됨의 충성만을 요구할뿐, 경제적으로는 거의 파산에 가까운 무능함으로 비춰진 까닭에 자연스럽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바알 숭배로 나아가고 있음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애굽에서 그 큰 이적으로 탈출케하셨고 광야 40년을 주리지 않고 지내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상황은 도전히 이해할수없는 극심한 경제적 궁핍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채우심은 의심받을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은 당장 배고프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진다. 제아무리 고상한 무언가가 있다해도 배고프고 춥고 고생스러우면 다 귀찮아진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이고 뭐고간에 당장 입에 풀칠할것 없고, 자식들이 배고파서 눈이 돌아가며 죽어가는 상황에서는 그저 돈많고 경제적으로 풍요하게 사는 복이 제일 크고 멋지게 보일수밖에 없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고상하고 큰 뜻이 있다하더라도 배고픔과 배아픔 앞에는 속수무책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의 상황에서 이것은 너무나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배고프면 고픈대로 하나님의 뜻이 있고, 아프면 아픈대로 주님의 계획하심이 있으며, 고통이 있다면 그저 고생스러워라하며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고통중이라도 주님의 뜻이 있음을 고백하며 뒤따라가는 것이 주님의 백성일찐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거룩하고 믿음 좋더라도 가난뱅이이면 뭔가 믿음에 문제가 있는듯이 바라보고 비춰지는 것이 작금이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모두들 다같이 잘 살아야하고 병도 없어야 하고, 만사형통해야만하고 ... 등따쓰하고 배불러야만 문제없는 신앙생활, 복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외치는 시대이다.
여호와와 바알의 절묘한 혼합의 상황, 우상숭배의 한가운데 우리는 서있다.
풍요의 신인 바알을 따르는 자들은 배고픔이 없고, 고통이 없고, 언제나 갑의 위치에서 호사를 누리는듯 보여질때, 뭔가 알듯모를듯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배부른 소리쯤으로 치부되고 만다. 배고픔의 상황과 극도의 경제적 궁핍의 지속앞에 체면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자식새끼 굶어죽지 않토록, 뭔 짓인들 - 그것이 도둑질이라하더라도 - 하려고 뛰어드는 것이 부모요, 인간이다. 더구나 바알을 섬기는 이웃이 승승장구 경제적 풍요 속에 불편함없이 살아가는 것을 굶주림 가운데에 보노라면, 그 상대적 박탈감은 극단의 행동을 유발할만큼 끔찍하다. IMF 시절에 자살함으로 죽어간 그 수많은 아버지들과 인간이기를 포기한 막가파 무리들...
그러므로 기드온은 쉽게 여호와만 의지하는것,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런 막막한 현실 중에도 왕되심과 통치하고 계심에 대해 수긍할 수 없었다. 사사로 세움받는 그 과정에서 경제적 궁핍과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하나님의 백성(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던)이 어떻게 다시금 여호와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돌아설수있는가에 대한 간곡한 어려움을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사사 기드온이다.
또한 엘리사 시대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보게된다(열왕기하6장).
아람의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다시금 진격해와서는 그곳을 오랜기간 포위함으로 물자의 공급을 끊어버린 기사이다.
기드온 경우처럼 있는것마저 빼앗아가는 것도 억울하고 괴롭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스라엘의 왕과 엘리사 선지자 그리고 성에 거주하는 많은 백성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원이 점점 줄어들고 남은 것이 거진 없어지게 되는 최악의 굶주림과 경제적 파탄을 경험하게 되었다.
얼마나 굶주림과 목마름이 심했는가하면, 단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역겨워하는 음식이랄수있는 나귀머리, 비둘기 똥 같은 것의 가격이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팔려나갈 정도였었다(25절). 당시 하루 품삯이 한 세겔이었는데, 나귀머리는 80세겔, 비둘기똥 사분의 일 가량이 5세겔에 팔려나갔다. 평상시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들이 몇달치 급료를 주고도 겨우 구할수있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름을 알수없는 이스라엘 왕이 이 참담한 현실을 겨우 견디며 성벽을 걸어가다, 한 여인의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때 왕은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라고 대답한다. 이 말은 기드온 처럼 포두주 틀에 숨어서라도 뭔가를 거둘 형편도 되지 않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여인은 식량을 구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찾아달라고 요청한다.
이웃집과 더불어 드디어 아들을 하나씩 삶아 먹기로 하고는 먼저 자기 자식을 삶아 먹었단다. 그리고 오늘은 이웃집 아들을 잡아 먹기로 했는데 그만 감추었다는 것이다. 빨리 찾아내어 끌고와서 잡아먹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던 것이다(28,29절).
왕은 그 참담한 요청 앞에 옷을 찢고 참담해 하면서 선언한다.
'엘리사의 목을 오늘중에 베어버리겠노라고... 이 참담한 재앙이 여호와께로 나왔음을 확신하기에 더이상 여호와 하나님을 기대할수없노라고...'(31,33절)
여기서 주목해야 할것이 이스라엘 왕의 급격한 심적 변화이다.
왕이 여인에게 이르는 말 속에서 여호와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고, 겉옷 속에 굵은 베옷을 입고 있을만큼(30절) 이 환난을 견디고 참다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실것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자식을 삶아 먹었다는 여인네들의 다툼 자리에서 기어코 여호와를 향한 기대를 접어 버린다.
결과적으로 표현한다면 여호와를 향한 인격적 믿음이 엘리사를 향한 원망과 미신적 확신으로 바뀌어 버린것이다.
인용한 두개의 본문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경제적 한계에 내몰릴 경우, 우리는 만사를 귀찮아하고 영적 반응도 겨우 겨우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할수있지만, 그 반대이다.
배고프고 돈없고 박탈당한 사람에게 이 상황을 벗어날수있는 물질적 축복을 약속하면 그 무엇이라도 따라간다. 얼마나 신속하게 여호와를 떠날수있는지... 더이상 여호와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소망을 접어버리면 그 다음은 못할것이 없다. 뭔짓을 하더라도 그 상황을 벗어나게 한다면 바알에게 집중하고 제사 드릴것이다.
이 상황을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뜻하심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저 이 상황을 모면하고픈 맘밖에는 없게 된다.
영적으로 옳든 그르든 간에 그저 이 상황을 벗어나게 해주고,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 종지부를 끊는 대박을 기대한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이런 경우는 왕왕 있었다. 우리네 삶도 마찮가지이다.
산상설교의 염려치 말것에 대한 본문에서도 결국 이런 경제적 피폐 상황과 같이 극단적으로 불편하고 거북한 상황에 처했다하더라도 이 상황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염려하다가 염려하다가 여호와를 떠나버릴것인가? 염려하다가 염려하다가 바알과 여호와를 혼합 짬뽕시킴으로 적당히 믿을 것인가? 염려하다가 결국 바알에게로 신속히 붙을것인가?...
이러한 경제적인 극심한 어려운 상황에서 비롯된 염려와 근심... 지금 당장이라도 마음이 혹하여 바알에게나 그 무엇에게나 복준다는 것에 마음이 쏠릴수밖에 없는 이 순간에 내리시는 예수님의 처방은 하루만 더 생각하며 고민하고 근심해라는 것이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하며 고생 고생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마치 바알처럼, 떡하니 한상 차려주시거나 경제적 풍요를 한순간에 펼쳐주시면 좋으련만...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으심이다.
주님은 '와서 죽어라!'하시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그 어려운 순간을 용케 잘 지내온 것은 분명한데, 지금은 마냥 캄캄하기만 하다.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원하는 우리를 다독이시며 믿음의 자리로 이끄신다. 생각해보라! 믿음이 적은 자들아! 고민해 봐라...하신다.
산상설교의 염려에 대한 처방은 이처럼 이방신의 맞춤식 축복의 유혹을 벗어나 다시 한번더 고민해보고, 한번 더 염려함으로 말미암아...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자신을 발견해 갈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
반면에 파송설교의 뱀처럼 지혜로울것을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언급되는 '염려하지 말것'에 대한 양상과 처방은 산상설교에서와는 약간 다르다.
여기서 빚어지는 갈등과 염려스러운 상황은 전적으로 사명 때문에 발생하는 사항들이다.
즉, 사명자, 소명자, 파송받은 제자로 나서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들이다. 다시 표현하면, 사명을 주시고 나를 파송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벌어진 사태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황에서 일어나는 무섭고 통제 불가능한 사태는 충분히 근심스럽고 염려스럽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믿음 고백을 들으신 후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하심과 같은 상황이 사명을 받은 자, 그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일임을 확인할 수 있다.
본문에서 빚어지는 일련의 일들은 어떻게 내가 통제하거나 조절할수있는 사안이 아니다. 거의 순식간에 연속해서 벌어진다. 정신을 차릴수가 없을 정도이다. 공회에 넘겨졌다가 회당으로 다시 끌려가서 피부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가도록 채찍 맞아 터지고, 이방의 총독과 임금에게 소환당해 재판받는 처지에까지 다다른다. 재판 결과에 따라 어떤 형벌이 내려질지 앞이 캄캄하다. 박해의 시대 같으면 영락없이 화형당해 밤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이 될수도 있을 것이고, 굶주린 사자에게 찢겨죽는 모습을 로마인들에게 볼거리로 제공되는 어처구니 없는 경우를 당할 것이다.
지금은 이런 물리적인 참형을 당하는 경우까지 가는 경우는 드문일이겠지만, 양상만 다를뿐 똑같이 당황스럽고 곤혹스러운 처지와 형편에 언제든지 놓일수있다. 예수에게 소명 받은 주님의 제자로 이 사회 구석 구석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현실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상황을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낸것과 같다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이렇게 학살 당할것만 같은 상황에서 뱀처럼 지혜롭게 처신함으로 이겨낼것을 또한 당부하심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상황으로 우리를 파송하신 분이 계시다는 점이다. 염려스럽고 힘든 여정에 처했지만, 이러한 상황은 소명(부르심)으로 말미암은 상황임을 결코 잊어서는 곤란하다.
주님은 이처럼 양상이 다른 염려스러운 이 상황을 벗어나고 이겨낼수있는 길은 파송하신 분을 놓치지 않는것, 나의 의도와 계획으로는 도무지 헤아릴수없는 이 상황을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며 허둥지둥 대다가 넘어지지 않을 것을 요청하시는 것이다(마 10:19 -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것을 주시리니).
이 파송의 현실 가운데 빚어지는 염려스러운 상황의 특징은 고민한다고 상황이 헤아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민하고 염려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머리가 복잡해지고 대처 방안이 없는 것같아 당황하게 된다는 점이다.
산상설교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하는 경제적인 궁핍으로 말미암은 배교의 상황과는 또다른 특징인 것이다. 그 상황에서는 오히려 고민하고 염려함으로 나의 마음을 추스리며 좀더 하나님의 이른비와 늦은비의 은총이 임하기를 소망하며 마음을 다잡아 가는 하루 하루의 염려인 것과는 달리, 이 상황은 고민하고 염려해봤자 별 뽀죡한 묘수가 생기기는 커녕 고민하고 염려하면 할수록 더 복잡해지고 더 불안해지고 앞날에 전개될 상황 앞에 마음이 무너지고 마는 경우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싸움의 전적 주권이 파송하신 이에게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나를 파송하며 이리 가운데로 보내셨다면, 소명자로서 내가 할일은 그분을 놓치지 않는것! 내가 가진 것으로 무엇을 말할까 어떻게 말할까의 관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이 무엇이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물어보며 듣기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뱀처럼 지혜롭다는 것은...
'그때에 말할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19,20절)'
성령에 주목하는 것, 성령의 충만을 계속 공급받는 것, 성령의 음성-말씀에 집중하는 것, 이 상황의 주도자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확인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뱀처럼 지혜로움은 파송받은 삶의 자리에서 나의 지식과 지혜에 의존하며 허세를 부리는 삶을 청산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삶의 자세이다. 또한 이리떼와 같이 나의 소명의식을 좀먹어 가는 삶의 현실 가운데, 진실로 이 상황의 왕이 누구인지를 내 삶을 통해 보여주는(이방인들에게 증거를 삼으시는 18절) 믿음의 본이 되는 과정이다.
뱀처럼 지혜롭다는 것은 먼지 쌓인 성경을 다시금 펴드는 것이다.
뱀처럼 지혜롭다는 것은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 은밀하게 나아가는 기도의 자리이다.
뱀처럼 지혜롭다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위하여 끊임없이 나 자신을 비워내는 것이다.
뱀처럼 지혜롭다는 것은 나를 보내신 주님만을 소망하며 바라보는 것이다.
에녹의 하나님과의 동행이 진실로 뱀처럼 지혜로운 삶이었음을 헤아리며 본삼자.
믿는답시고, 하나님과 동행한답시고 뭐 거창하게 떠들썩하거나 요란스럽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뭐가 이루어질듯 야단스럽지도 않았다. 주위에서는 눈에 주목할만한 대단한 업적들로 감탄하며 웅성거릴때, 그의 삶은 단조롭고 초라하기까지 보인다. 그러나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 쉽지 않은 길을 걸어간 것이다. 타인의 눈에 비치기에는 '뭐했어?' '뭘 남겼어?' '한게 뭐있어?' 힐난당할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여정은 뱀처럼 지혜로움을 위한 치열한 성령충만의 순간순간이었음을 우리는 알것 같다.
보냄 받은 이 현실을 살아가는 이 순간이 얼마나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기가 어려운 가를 실감하는 우리의 삶이기에... 에녹의 하나님과의 동행은 실로 거대한 거인의 삶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파송받은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 보내심 받은 양으로 살아 남고 싶은가? 아니면 파송받기를 중단하고 소망없는 자로 하나님과 멀어질것인가의 기로에 우리는 서있다. 아마 확률적으로 더 큰 부분은 후자일 것이다. 성령을 지혜를 의지하며 말씀과 소망의 기도 중에 양으로써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하루 하루를 버티는 것은 실로 어려워 보이는 좁은 길이다.
그러나 포기할수없음을 우리는 알고있다. 이 땅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뜻을 위하여 살아가는 믿음의 길을 포기하고 내려놓는다는 것은 주님과 상관없는 자로 발견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종말에 평생을 예수와 상관있는 것 처럼 살았지만, 결국 상관없는 자로 밝혀지는 수 많은 염소의 웅성거림이 귀에 맴돈다.
바같 어두운데 내어 쫓기어 슬피 울며 이를 바득바득 가는 그 섬뜩한 소리가 내내 빠지락거린다.
먼지 앉은 성경의 먼지를 훅 불어내자.
의무감이 아닌 생명을 위하여 아침 미명의 단잠을 깨워 말씀을 펼쳐 읽어 주님의 음성을 듣자.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총, 성령의 음성에 마음을 기울이며 의지하자... 이것이 뱀처럼 지혜로워 이리 가운데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인것을...
3.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두번째 상황이 이어진다.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것과 같은 첫번째 상황에서 제자들은 뱀처럼 지혜로워야만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음에 대해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이리 가운데 던져진 두번째 상황을 지적하시며 그 대처방안(생존 비법)을 명심시키신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기!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첫번째 상황은 뱀처럼 지혜로워야만 승리할수있는 세상 가운데로 우리가 파송받았음을 직시하도록 하심이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가진 이질적인 성격을 직시함으로 세상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 즉 성령께서 무슨 말할 것을 주심에 의지해야 함을 뱀처럼 지혜롭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이해했다. 이질적인 세상의 권력과 위협 앞에 주눅들거나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고 압도당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민망한 마음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는 소명의 발걸음이 포기하거나 잃어버리게 되는 사태를 맞지 않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소망함이다. 이는 이질적이어서 도무지 섞일 수 없는 문제 앞에 나의 지혜와 권능 만으로 맞서거나 의지함이 아니라, 오직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함으로 양으로서의 생존을 보장받을수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질적인 세상의 권세를 무너뜨리실 분은 오직 정사와 권세를 능히 멸하실 하나님 뿐이심을 의지함이다(엡6:12).
두번째 상황은 정사와 권세와 같이 위협적인 위세는 아니지만, 속이 상하여 부글부글 끊어 넘쳐 홧병으로 쓰러질수있을 법한 상황이라고 할수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투사와 같이 전신갑주를 취하고 손에 방패와 양날의 칼을 들고 용감하게 맞서야 할 경우가 있지만 이런 경우는 사실 극히 일부분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게 싸우다가는 판이 깨져버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이 있다. 21절에 보여지는 바와 같이 형제간의 어떤 다툼, 부모와 자식간의 어떤 상황들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의 어떤 미묘한 관계 혹은 익명의 다수 군중들과의 줄다리기 등이다.
이런 상황들은 단칼에 어떻게 해결되는 문제들이 아니다.
형제간의 다툼이나 부모 자식간의 갈등, 이웃과의 지리한 줄다리기 그리고 일반 대중들의 인식 변화 등의 문제는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지리한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자식이 원수인경우도 있고, 부모가 원수인 경우도 있고, 형제가 원수처럼 느껴질때도 있다. 그렇다고 어떻게 확 처리할수가 없다. 왜냐하면 연결된 끈이 너무 많고 고려해야할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연을 끊고 잊자해도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법적으로 호적을 파고 분쟁을 법적 판결을 받아 어떻게 한다해도 그 앙금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이처럼 주님께서 다루시는 둘째 상황은 인생을 살아본 사람만이 느낄수있는 관계의 문제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셔서 임마누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땅을 살아보지 않으셨더라면 사실 잘 모르실수도 있을법한 상황들이다. 과부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그래서 히브리서 4:15에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주님께서 체휼하신 연약한 인생들의 여러 관계로 맺어진 우리네 삶이 파송의 현장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파송하시면서 소명 받은 자는 모두 이방 지역의 선교사로 모두 의무적으로 다 떠나라고 하셨더라면 오히려 속편할 일이 더 많았을것같은 것이 우리네 모습이다.
몇몇 사람들만이 선교사로 떠날뿐, 대부분의 소명자들은 직장과 가정 그리고 이웃들 틈바구에 남겨져있다. 그리고 그 틈에서 소명자로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기실 이 상황이 이리가 득실득실한것과 같음이다. 고만 팍 떠나서 전혀 낯선 환경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라고 한다면 오히려 더 쉽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만만치 않은 이리들과의 동거가 시작된것이다.
직장 생활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최선을 감당한다지만, 그게 쉬운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실험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현대 실생활 가운데 그대로 적용하며 1년을 살고나서 쓴 글 중에 이런 표현이 있다. 한가지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한가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빈번했노라고... 예를 들면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서 여직원과 계산을 하는중에, 생리 중인 여자와 접촉하지 말라는 레위기 15:19 때문에 혹시 여직원이 생리 중일까봐 그가 건네는 잔돈을 그냥 카운터 위에 올려주세요 말했단다. 그러자 그는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직원에게 '감기에 걸려서'라고 거짓말을 했노라며 씁쓸했다고 한다(미친 척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본 1년/A J 제이콥스/세종서적).
한가지를 제대로 하면 다른 것이 삐꺽되는 현실을 매일 경험하며 살아간다.
업무보다 더 어려운 것이 동료와 상사들과의 관계의 문제이다. 실상 일이 힘들어서 관두는 것보다 관계적인 측면에서 깨지고 갈등을 빚다가 더러워서 그만 두는 경우가 더 많다. 옛날에는 정이라도 돈독했는데, 요즘은 다들 자기 권리의식이 높아져서 깍쟁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오히려 희생정신을 살려 괜히 나섰다가는 덤터기 쓰고만다. 구조조정이니 뭐니 하면서 조직 사회 속에 머물기가 살얼음판 건너는 것같은 세상이다. 이런곳에서 두얼굴 가진 헐크가 아니라 순전한 양으로 살아남기!
관계의 문제는 가족 속에서도 점점 더 확대되고 복잡해진다.
처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내 주장만 열심히 하고 살면 되지만, 어느샌가 부모가 되고, 사위 며느리가 된다. 자녀로서의 도리, 형제간의 우애와 분담, 부부로서 서로의 육아분담과 양가 부모 섬기기, 친척 일가 중에 사람 도리하기 ... 등으로 외연이 확대된다.
이웃과 담쌓고 그저 모른척하고 살면 속편할텐데, 다닥다닥 붙어 살다보니 주차문제, 아이들 다툼이나 소음 문제, 이웃 사촌이라며 넉살좋게 지낼려다보면 손해보거나 신경질이 날만한 상황은 점점더 빈번해진다. 이런 여러 관계들 속에서 홧병나서 드러눕거나 무관심 해지지 않고, 온전한 소명으로 똘똘뭉친 양으로 살아가기!
기실 이런 이리떼의 상황이 더 무섭다. 더 피곤하다. 웬수같은 것들이라 팍 끊고 싶어도 가족이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넘어가노라면 비참하기까지 하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곳으로 우리를 보내셨다. 소명을 품게 하셔서 하나님의 권능을 품은 사명자로 멀리 보내시지 않고 바로 이곳으로 내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가도록 파송하셨다. 오우! 할.렐.루.야~!
이러한 우리의 일상의 삶, 관계로 얽혀있는 이리의 상황은 필연적으로 정서적 상처를 끼치게 되어있다.
관계에서 빚어지는 미묘한 감정은 예상치 않았던 오해와 갈등이 증폭된다. 진심이 통하지 않고, 선의의 행동이 자칫 오해를 불러 섭섭하거나 오히려 황당한 누명을 덮어 쓰기도 한다. 그래서 때론 유치해지기도 하고 치사해지기도 한다. 또한 참을만큼 참았어하면서 결국 폭발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이런 삶의 관계에서 얼마나 우리의 정서가 치명상을 입고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채로 성인아이가 되어가는지를 경험하셨을 것이다. 그로말미암아 소명의식이 도중에 훼손되거나 무너지는 것을 살아보심으로 절감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첫번째 상황보다 두번째 형국이 인생으로 나그네 여정을 지겹도록 살아가야 하는 대다수의 제자들에게 더 심각하고 난감함을 표현하시며 그 처방을 일러주시는 것이다.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예수님의 처방은 우리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다.
가정에서 형제끼리 다툼이나 이해관계로 인해서 싸움이 잦아지고 불화를 경험하거나, 부모와 자식간에 대적하여 서로를 향한 최소한의 도리마저 포기하거나 돌아섬으로 말미암아 정말 어처구니 없는 뉴스꺼리가 만들어지는 그 순간이거나, 혹은 예수님을 믿고 말씀을 순종하는 것으로 인하여 일가친척 내지 어떤 단체의 사람들에게서 예상치 않은 미움이나 공격을 받는 그 순간에 우리는 기대한다.
주님의 은혜가 강권적으로 개입해주시기를... 그래서 어느 한쪽을 변화시키든지 아니면 양쪽을 치시더라도 깨닫게 하시든지간에 그 상황을 변화시켜주실것을 소망한다. 너무나 간절히 기대한다. 그래서 변화가 있는 삶을 기대하고, 지금은 어렵지만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귀결될것이라 꿈을 꾼다. 그러나 현실은 아무런 변화없이 그저 시간만 흘러갈 경우가 더 잦다. 내가 이 괴로운 상황 가운데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서, 조금만 더 이런 문제로 아파하면 내가 오히려 미칠것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회복은 커녕 오히려 감정의 기복이 더 깊어짐으로 가슴이 까맣게 타버리고 만다.
우리의 삶을 체휼하신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개입해주시면 어디 덧날까싶다.
아신다면서 왜 그냥 보고만 계시는가 싶다. 원망스러움으로 가슴이 휑하니 뚫리는듯할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비둘기처럼 순결할것을 바라는 주님의 음성을...
본문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요약하면 '견디다가 피해라!'이다.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처방은 자신의 삶 자체이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을 향한 소명을 품고 오심 자체 - 그 성육신의 자체가 그분에게 있어서는 견디는 것이었다. 죄없으신 분이 죄많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 자체가 모순의 삶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품고 당신의 피조물을 민망한 마음으로 가슴에 품고 이 땅을 살아가심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진실로 몸에 맞지 않을 옷을 입은 거북함과 같은 생애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자들을 양육하시며 갖은 고난을 함께 하시며 십자가의 길을 향하여 가까이 나아가실때 그 순간 순간이 얼마나 고통이었는가는 새삼 표현치 않아도 충분할것이다.
제자들의 배신과 사람들의 오해와 질시, 채찍질과 모욕, 침뱉음과 가시 면류관 그리고 많은 이들 앞에서의 심문과 넘겨짐... 살점이 떨어져 나간 어깨위로 짊어진 십자가... 얼마나 쓰라리고 아프고 힘들었으면 세번씩이 넘어지고 쓰러지셔서 결국엔 일어나지도 못하셨을까... 얼마나 많이 참으시고 견디셨는가...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의 사랑, 사랑을 베풀만한 가치도 없는 우리들을 그 큰 사랑으로 덮어주신 그 은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들리울때 그 고통... 모진것이 목숨이라고 빨리 죽지도 못하게 고안해낸 가장 끔찍하고도 고통스러운 십자가 형벌... 주님이 몸소 견디셨다. 그것이 주님의 사명을 꺽지 않도록 애써 참고 견디심이었다. 골고다 언덕에서 땀에 피가 베일만큼 고민하면서도 결국 더 버티고 조금만 더 참으시기를 작정하신 헌신이 우리에게 대속의 은혜로 생명 주심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끝이 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것을 참고 견딜수있었던 것은 끝, 종말이 있기 때문이셨다. 끝이 없으면 참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것이다. 이 모든 것을 견딜수있는 원동력은 끝이 있고 새로운 시작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의 이 땅에서 나그네 여정에서 빚어지는 나도 어찌할수없는 수많은 관계의 문제와 곤혹스러운 상황 앞에 견딜것을 요청하신다.
견디다가 견디다가 정 못견디겠으면 피할것을 말씀하신다. 피해서라도 우리가 양으로 파송받은 사명의식이 무너지지 않고 포기되지 않기를 소망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종말의 때를 살고있기 때문임을 분명히 약속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이스라엘 동네가 만약 10개 정도 있다고 치자. 그냥 메뚜기같이 폴짝 폴짝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본삼아서 끝까지 견디며 참고 인내하며 그 동네에서 살다 살다가 '여기에 더이상 있다가는 나의 이 민망한 주님의 마음(소명)을 잃어버리겠다' 싶을 정도로 참고 견디며 다음 동네로 피하고, 또 그렇게 살다 살다가 다음 동네로 피하면서 산다면... 과연 이 10개의 동네를 우리 생애 동안 다 다닐까? 분명한 것은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닐것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그런 마음으로 견디며 살다보면 서너군데 밖에 다니지 못할것이다.
예수님은 약속하신다. 이스라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겠다!!!
끝이 있다. 영원할것 같지만, 십자가 그 고통이 영원할 것 같고, 지옥에 내려가신 3일이 영원할 것 같았지만, 끝이 분명히 다다랗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었다!
인간인지라 한계에 만나 극한의 상황에 이르렀을때, 양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모습으로 다시한번 더 견디고 피하고 버티는 삶... 이스라엘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주님 오셔서 눈물닦아주실것을 약속하심에 우리의 마음을 쓸어내리자. 새까맣게 불타버려 가슴에 휑한 구멍 난것, 예쁘게 가득하게 복스럽게 메워주실 주님을 소망하는 종말 신앙의 자세... 그것이 비둘기같이 순결한 삶이다.
첫 열매이시고 부활이신 예수님의 위로와 약속이 기다리고 있음에 사명자로, 소명을 품은 양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며 욕먹고 손해보고 이용당하고 속이 타는것 같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원동력이지 않는가!!! 만일 이 약속이 없다면 우리 크리스찬은 얼마나 불쌍하고 바보같은 인생이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도 15:14~20) 할렐루야!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아멘...
죄없으신 예수님께서도 참으신 그 길... 투정부리고 짜증내면서도 그 길 따라가길 또한번 기도하게 됩니다. ...예쁘게 가득하게 복스럽게 메워주실... 우리 주님 소망하는 저녁입니다. 유익한 시간입니다, 긴 글 읽기엔 눈이 시린 나이가 돼 버렸다는게 쪼금^^ 슬프지만... 히히.. 우리주님 내주님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