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송설교의 두번째 메시지(마 10:11~15) ; 파송의 성격 / 개털 모자냐! 황금 면류관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예수님에게서 들려지는 파송설교의 두번째 본문은, 파송 받은 삶의 현장에서 빚어지는 일련의 반응과 그것에 대한 파송 받은 제자의 태도를 다루고 있다.
즉, 파송 받은 삶의 일상에서 만나는 인상적인 경우는 대개 두가지 상황일 것이다.
그것은 파송 받은 제자와 복음에 대해 긍정적이어서 열매를 맺는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 -부정적이며 열매를 결국 맺지 못하는 현실-일 것이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어떤 성이나 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긍정적인 경우(열매가 있는)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씁쓸히 뒤돌아서야 할 경우에 대해 언급하신다. 여기서 주님은 이 두가지 상황 중에서 긍정적이며 열매가 있는 사역에 집중할 것을 요청하며 독려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파송 받은 제자라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자세인가를 다루고 계신다.
예수님은 실적을 원하지 아니하신다.
그래프를 그려가며 비교하여 경쟁심을 유발시켜 좀더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도록 독려하시며 소리를 높이시는 분이 아니다.
본문의 지시가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보완하여 좀더 빠른 시일 내에 업적을 드러내도록 촉구하는 메시지가 아니다.
오늘날의 관점에 비추어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더 어울려 보인다해도 우리는 자제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경쟁시키시어 능한 일꾼으로 더 많은 열매 맺도록 훈련시키는 교관이 아니시다.
그렇다면 파송 받은 우리네 삶의 일상에서 맺어야 할 진정한 열매가 무엇일까...?
실적으로써의 열매가 아니라면 어떤 열매를 파송의 자리에서 맺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진실로 주목해야 할 사실들!
우리는 모두 작은 예수로 이 땅에 파송 받은 주님의 제자들이다.
우리는 '예수의 마음을 품은' 하나님의 사람 -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임마누엘의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수님이 첫 열매가 되셨고 우리는 그의 뒤를 잇는 열매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런데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맺어가는 열매가 나쁜 열매가 아닌 좋은 열매일 때에만 하나님이 인정해주심이며, 반석위에 세운 사람이 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발견됨을 분명히 하신다(마 7:15~27).
예수님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네 삶에 정말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맺는 열매이다!
열심으로 예수님을 따라가고 예배드리며 능력있는 삶을 살았다하더라도 나쁜 열매를 맺었다면, 심판 날에 예수님의 이 말씀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라가라' ..."
그러므로 파송 받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서 내가 맺어가야 할 열매에 집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어야 한다.
흔히 우리는 이런 농담을 하곤 한다. '그래 너는 열심히 열매 많이 맺어 황금 면류관이고, 나는 이렇게 살다가 개털모자라도 괜찮아!'라고...
은연중에 이런 생각이 굉장히 광범위하게 깔려있음이 두렵다.
개털모자라도 얻어 건지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쩔 것인가!
우리가 맺어가는 열매가 주님 보시기에 그것은 개털모자감도 아닌, 그저 나쁜 열매라고 판단하시면 어쩔 것인가!
본문은 이에 대해 몇 가지 예수님의 의견을 전달해주고 있다.
즉, 우리네 삶에서 맺어야 할 좋은 열매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나쁜 열매는 또 어떤 것인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얼핏 보기에 첫번째 상황-합당한 사람을 만나 머물면서 하나님의 평안을 임하게 하는 사역-이 좋은 열매의 표상이고, 두번째 상황은 다소 부정적인 열매 즉, 나쁜 열매를 맺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첫번째 상황과도 같이 긍정적이고 열매있는 상황으로 나아감을 사모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단정해 버리기도 한다.
그 반대로 두번째 상황처럼 열매 맺지 못했을 경우, 서운한 마음과 섭섭한 마음에 악을 박박쓰며 저주라도 하듯이 발의 먼지를 털어내며 말하기를, '이 나쁜 놈들 두고 봐라... 어디 꼴 좋다. 멍청한 녀석들! 그것도 못 알아듣다니... 하나님의 선물을 이렇게 문전박대하다니, 저주 받을 놈들...쯧쯧...'하면서 못내 열매 맺지 못한 무능함을 핑게거리하는 패배자의 모습 혹은 무능한 제자의 표상처럼 여기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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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다시금 자세히 읽어보자. 본문을 낯설게 만들자.
낯설다는 것은 내 앞에 놓인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능력이 생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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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본문에서 먼저 발견되는 특이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관찰한 부분이 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대체로 자세히 읽으며 관찰하다보면 다음과 같은 몇가지 점에 주목하게 된다.
먼저는 과연 첫번째 상황(영접하여서 평안이 머문 곳)과 두번째 상황(영접지 않아서 발에 먼지를 털어 버린 곳)이, 파송 받은 제자들이 맺을 수 있는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에 대한 실례인가 하는 점이다. 즉,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둘째는 시점에 대한 것이다. 이 짧은 본문에 2개의 시점이 겹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파송 받은 제자들이 일하는 현재적 시점과 15절의 심판이 있을 미래의 시점 - 이 별개의 시간이 하나의 본문에 나오기 때문에 다분히 헷갈릴 수 있겠다는 우려가 두번째 관찰되는 사항이다.
세째는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는 행동이 과연 실망하거나 낙심함으로 말미암아 상대를 저주하거나 책임을 면한다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지시되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네째는 본문이 단순히 파송 받은 여행길에서 숙박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마치 배낭여행 혹은 무전여행 떠난 사람들이 하룻밤 묵을 잠자리 얻기 위해 필사적인 것과 같은...)하는 문제를 지적하시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이다. 더불어 요행히 숙박하고 나서 어떻게 사례할 것이며, 거절당했을 경우의 행동요령에 대한 지시일까 하는 궁금함이다.
다섯째는 (다소 엉뚱하지만) 약간의 돈몇푼이면 해결될 일을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파송설교의 두번째 부분을 자리하고 있는가하는 궁금함이다. 정 잠잘 곳 찾지 못하면 노숙이라도 하면 될 것을...하는 몇가지 낯선 관찰꺼리들이 눈에 띌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관찰을 토대로, 본문의 작은 문단을 찾아 나누고 제목을 붙인다면 다음과 같다.
vv. 11~13 두 부류의 합당한 사람들...
vv. 14~15 결국 실패해버린 속쓰린 순간!
1. 합당한 집도 두 부류가 있다!
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합당한 자를 찾아낸다는 것은 복음의 수용성이 있다는 것과 아울러 기꺼이 파송의 현실을 이해하여 협조(동조)하는 동역자를 찾으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파송 받은 제자들의 일차적 과제는 그러한 가정을 찾아 발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사실 만만찮은 숙제이다. 왜냐하면 나그네를 영접하며 섬기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이며 신앙적 실천(미덕)이기 때문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이런 친절을 베푸는 가정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정작 이 문제가 어렵다는 것은 이 과제가 단순히 숙식의 해결에 있음이 아니라, 예수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신앙적 실천에 머물고 말것인가의 긴장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 13절에서 나타나는 '평안이 합당한 경우'와 '평안이 합당치 않은 경우'는 파송의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사역의 결과물이다. 즉,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서 합당한 자를 찾아내기 위해서 나름 기도하며 고분고투하며 사역하며 떠나기까지 최선을 다한 결과가 이러한 두가지 모습의 열매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전혀 다른 두 부류의 만남이 가져오는 갈등과 긴장감의 결말이다.
신실한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평안은 다분히 세속적이며 현실적이다. 지칠만큼 지쳐버린 그들의 고단한 일상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기적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의 안녕에 있었고, 다윗 나라의 재건에 있었다. 힘세고 영웅적인 삼손 사사와 같은 메시아가 오셔서, 작금의 암울한 현실을 한순간에 변화시킬 것에 대한 소망만이 남은 자들이었다. 자신들을 신의 나라 삼으시고, 모든 것들 위에 세우실 것에 대한 거룩한 바램이 녹아있었다. 그러므로 이 소망 중에 그들은 자신의 믿음과 신앙적 가치를 전승하며 실천하는 진실로 거룩한 백성들이었다.
그런 사람들 중에 몇몇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 부름 받았으며 새로운 소망의 절정을 맛보았다.
삼손, 기드온 혹은 에훗 같은 멋진 문제 해결사로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종되어 섬기기 위해서 낮고 낮은 자리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뵈었고, 그분의 마음을 나누었고, 주님의 소망을 읽었다. 이러한 뜻밖의 하나님의 계획은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예언된바, 낮아지고 섬기며 죽기까지 낮추어질 때 발견되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 그 자체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파송 받은 제자들은 기존의 전통과 신학으로는 이단아로 비춰질 뿐이었다.
그러므로 질적으로 너무나 다른 두 부류의 만남과 교통은 긴장감의 연속이다.
유대인으로서 영적 책무를 다하고자하는 열심과 우리 주님 예수의 민망한 마음을 품은 열정의 만남이 빚어내는 갈등의 현장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폐기되고 유효기간이 지난 가짜 평안이 아니라, 새롭게 시작하시고 완성을 향해 엄청난 열정을 쏟아 부으신 임마누엘의 진정한 평안이, 파송 받은 제자에게서 나누어질 것을 기대하셨다. 또한 그 기대하신대로, 주님의 민망한 마음을 품은 제자들은 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며 나아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의 두가지 상이한 결과가 드러나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첫번째 소문단(두 부류의 합당한 사람들)에서 다루는 바가 조금은 선명해진 셈이다.
그것은 파송 받은 제자들이 무엇에 집중할 것인가에 대해서이다. 즉, 예수님의 제자로서 파송 받아 가는 소명자의 삶에서 진정으로 집중해야 할 것은 나의 열심이나 지혜 혹은 어떤 기술적인 도구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역사가 진실로 변화를 이끄는 힘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럴 때 분명한 두가지 결과가 나타난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13절의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라는 표현과 같이, 그곳에도 동일한 임마누엘의 역사가 자리 잡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둘째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라는 점이다.
이는 우리의 사역의 현장에서 나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음에 관한 영양제와 같은 약속이다. 머물렀던 신실한 유대인 가정이 결국 자신의 전통과 신학적 고집스러움에 메여, 새로운 피조물인 임마누엘의 역사를 애써 부정하거나 무시함으로 끝내 복음을 거부할 경우이다. 이 경우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선을 긋고 계신다. 제자들이 부족하거나 모자라거나 혹은 게을러서 혹은 실수했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신 것이다. 이 나타난 결과는 신실한 유대인들이 얼마나 그들의 신앙이 고착화되고 문자적으로 얽매여 버렸는가하는 점을 웅변해 줄 따름이지, 제자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결과로 인하여 상처받거나 쓰라린 실패의 속상함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 채 패배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신다. 오히려 이 일로 말미암아 우리를 더욱더 풍성케하실 것을 약속하심이 강조되고 있다.
2. 결국 실패해버린 속쓰린 순간!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작은 단락 두번째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주의해야 할 것은 '...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흔히 이 표현은 신실한 유대인들이 성지로 돌아올 때, 이방 지역을 다녀오거나 지나면서 그 지역의 흙이 신발에 묻어 있는 것조차 싫어하며 용납지 않는 그들의 신앙 표현이었다. 이것과 흡사한 구절이 사도행전13:51과 누가복음 9:5에 기록되어있다.
대개 이러한 표현을 이해하고 설명할 때, 유대인들이 이방 성읍을 떠날 때 발의 먼지를 떨구었고, 이러한 모습을 신약의 파송 받은 제자들이 상징적으로 본 삼아서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이 받을 엄중한 심판을 경고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도행전 13:51의 바울과 바나바의 행동은 어느 정도 이해되지만(당연히 이방지역의 전도 여행길이었기에...), 어떻게 이방지역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상징성 있는 행동이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가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만일 이 말 그대로 이해한다면,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유대인들을 이방인 혹은 개로 취급한다는 의미가 된다. 현재 제자들은 이방지역이 아닌, 유대지역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님께서 자신의 잃어버린 양들을 저주하며 다시 안볼 것처럼 대하시며 개 취급해 버릴 것에 관한 명령을 주시면서, 파송 받은 제자들의 쓰린 속을 달래어주시는 것일까? 한번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해서 저주의 상징을 남발하며 깨끗하게 선 그으며 저주를 선포해야만 속이 시원해서 다음 사역지로 옮겨갈 마음이 생기는 것일까?
본문을 다시 자세히 읽어보자. 이렇게 해석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살벌하고 몰인정이 뚝뚝 흘러 내려 정나미가 딱 떨어지지 않겠는가!
주어진 본문을 이해하는 핵심은 '너희 발의 먼지를 떨구는' 것에 있지 않다. 이 표현자체에 얽매이면 전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본문에서 진정 주목할 것은 시제에 관한 것이다. 즉 14절의 현재 시점과 15절의 미래 시점이 혼합되어 있음에 주목하는 것이다.
15절의 심판날은 미래의 어느 사건이다. 그것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사실 알 필요도 없다. 알면 더 문제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다.
그 심판이 아무리 가혹하고 무섭고 살 떨리는 형벌이라 하더라도(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쉽다는 표현에서 느껴지는), 지금 일상의 현실을 살아가는 나와는 기실 아무런 관계가 없다. 즉 그날이 소돔과 고모라 이상의 상황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심판의 결과나 과정 그 모두는 나와 별개의 문제이다.
심판의 결과는 오직 주님께만 있다. 심판의 주님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동안 심판 날이 이를 수는 충분히 있겠지만...^^;;;)
이 문단에서 언급하시는 주님의 명령은 심판의 결과는 주님께 맡기고 , 우리는 파송 받은 현실에서 나타나는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다시금 파송의 자리로 나아가는 제자도의 부르심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는 상황을 만났을 때, 부르심을 입어 파송 제자로 살아가는 누구나가 당황스럽기는 마찮가지일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결과가 파송 받은 제자의 개인적 역량 부족 혹은 실수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을 주님께서 분명히 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이 속쓰린 실패처럼 보이는 이러한 결과는 하나님의 복음이 가진 역동적인 역사의 산물이다. 유대인들 자신이 기존에 간직하고 있는 신앙적 확신과 신학적 견고함과 이를 깨어 부셔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침투해 가고자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당연한 결과물이다.
이땅 인간의 역사 한가운데 침투해 들어오신 임마누엘의 역사가 파송 받아 섬기는 사역의 현장에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지며 녹아드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파송 받은 제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사역의 결과물에 얽매여서 비교와 경쟁심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많은 실적을 쌓는 일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지금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밭을 향하여 부단히 복음-말씀의 씨앗을 뿌리고 또 뿌리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는 점이다.
심판 때에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를 가려 추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현재적 가치 - 전하고 가르치고 고치고 나누는 삶 자체가 의미 있는 사역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교회나 부서에서 그리고 경쟁자로 비춰지는 사람들 가운데서, 개인의 성취와 열매에 집착함으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비교와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지를 떨어버리는 제자의 모습에서 주님의 기대하는 바는, 실패했다고... 열매가 없다고... 남들과의 비교 경쟁에서 뒤쳐졌다고... 안타까워하고 오기를 부리며 '다음 기회'를 노리는 부릅뜬 눈매를 의미함이 아니다. 오히려 열매는 하나님의 몫이기에 실패의 현장에서 다시금 묵묵히 제자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갈 것에 대한 소망이다.
참으로 자유로운 삶으로의 초대이다. 눈앞에 비교되는 열매와 결과에 얽매이지 않는 삶으로의 초대가 예수님의 부르심이다.
열매 없음과 제자로서의 무능함에 그 어떤 연관관계도 설정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따른다는 것이 동역의 핵심이다.
우리는 조직으로의 부름이 아니라, 가족으로 부르셨다. 동역자로 우리를 초대하시며 권능을 더하셨다. 한 몸인 공동체로의 부름인 것이다.
비교하지 않아도 족하다. 열매 없는 결과에 안절부절하지 않아도 괜찮음이다. 그저 에녹의 하나님과의 동행과 같은 삶이면 충분하다. 뭐 거창하고 희한한 일 없어도, 임마누엘의 은혜로 또 하루를 살아감이 더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상당한 사건들은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에 무관심함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음이다.
주님의 음성과 뜻이 무시되고 잊혀짐으로 말미암아, 그 자리를 사탄적인 세속의 관점과 질서가 대신한 경우이다. 세상의 가장 기본 질서와 부추김이 비교와 경쟁이다. 이 땅의 권세와 정치적 추구가 민주적이라는 명분을 쓰고 끊임없이 상대방을 밟고 일어서며 치고 얻어터진다.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사회 그늘에서 경쟁의 치열함에 상처받거나 혹은 성공함으로 전부를 취하거나 또는 전부를 잃어버림으로 자살하거나 코너로 몰리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어린 학생들마저도 철저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비법에 목말라한다. 그 틈에 누군가는 창문에서 떨어짐으로 생을 스스로 마감하기도 한다.
이런 정글에서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잃어버리거나 놓쳐버린다면, 똑같은 경쟁과 비교, 결과주의가 만연해질 수밖에 없다. 교회끼리 경쟁하고, 부서끼리 비교당하고, 스타 목사와 좀도둑으로 내몰리는 교역자가 나타날 것이다.
개털모자 혹은 황금면류관... 이런 생각이 무섭다.
천국에 가서까지 능력이나 상급에 따라 차등적인 질서를 꿈꾸며 소망함이 낯간지럽다.
얼마나 이 땅에서 경쟁에 시달리고 쇠뇌 당했기에 천국에까지도 이러한 세상적 질서와 사탄적 차등을 꿈꾸고 소망하는 것일까!
오직 주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삶에 적용함으로 파송 받은 제자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다소 '바보같이 보이는' 삶의 방식은, 패배주의자들의 자기 변명적 삶이 아니라, 좁은 길을 선택한 능력의 길이며 참으로 힘든 소명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두가 비교와 경쟁, 결과에 미친 듯이 목메는 세상에서,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저 유유자적함은 외유내강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는 도전의 삶이다.
무능해 보이며 쉬워 보이는 길 같지만, 정작 성령 충만의 삶, 임마누엘의 은총이 깃든 삶이지 않고서는 결코 갈 수 없는 제자의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