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송설교의 첫번째 메시지(마 10:5b~10) ; 사역의 본질


5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먼저 이 본문을 읽고 들었을 때 일어나는 느낌들을 솔직히 먼저 나눈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을 것이다.   '상당히 배타적이다'는 것과 '뭐야? 앞뒤가 맞지 않잖아!'하는 두 가지 느낌일 것이다.


첫번째 반응은 5~6절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바이고, 두번째 느낌은 7~10절을 조금만 주의해서 읽다보면 발견되는 바이다.  7절과 8절에서는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거저 나누어 줄 것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이내 9~10절에서는 타인에게서 공짜로 받아먹고 필요한 것을 공급받아라하신다. 그것도 이런 모양새가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하다고 언급하는 주님의 의도가 못내 궁금하다.


***

[Tip. 본문을 읽고 이해함에 있어서 도움 되는 한 가지 방법 - 본문을 낯설게 만들기!!!

사실상 이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본문 중 하나이기 때문에 자칫 건성으로 읽을 수 있다.

익숙하다는 것은 선입견이 작용 할 수도 있고 또한 본문의 메시지를 내가 알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번째 조치가 자세히 읽기이다.

본문을 자세히 읽고 관찰한다는 것은 익숙한 본문을 낯설게 만드는 작업이다.

자세히 주의해서 읽고 또 읽다보면, 정작 내가 이 본문을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매우 유익한 작업이다. 내가 안다고 느꼈던 본문이었는데 막상 내가 이해하지도 못하고 알고 있지 못한 본문이었구나 하는 단계에 이를 때, 비로소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주님의 말씀에 한발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이다]

***


상당히 배타적인 느낌이 가득한 5~6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본문과 느낌이 비슷한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마15:24)"이다.

9:36에서는 파송의 대상이 '목자 없는 양'으로 표현되었지만, 본문에서는 그 대상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으로 다소 표현이 바뀌고 있다]


왜 예수님은 유독 제자들의 발걸음을 이스라엘, 그것도 '이스라엘 집 전체'가 아니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접근할 것을 요청하고 계시는 것일까?  너무나 범위가 국한되고 이방인들 입장에서 이 말씀은 상당히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은 이러한 명령을 직접적으로 설교의 첫머리에서 언급하시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만 한다. 불필요한 오해와 선입견을 일으키는 것은 본문이 의도하는 바를 제대로 짚지 못하고, 내 입장 혹은 전통적인 견해에 붙잡혀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본문은 많은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다양한 해석들이 시도되고 있다.


대표적인 해석의 방향이 '복음이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주어진 명령'이라는 접근이다.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오셨고 약속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이 약속의 성취(메시아의 출현과 병 고침 등등의 권능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이 오직 여호와의 약속을 믿고 기다린 유대인들뿐이라는 취지)가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주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듣고 나면 더 혼란스러워진다.  오고 오는 많은 예수의 제자들이 이 파송설교를 듣고 믿음으로 실천해야하는 절체절명의 말씀 중 하나인데... 이렇게 중요한 위치에 굳이 오해와 억측 그리고 배타적인 느낌 가득한 내용으로 채울 필요가 있는가하는 점이다.  비단  위의 해석이 나름 중요하고 의미 있지만, 다시 한번 본문을 유의해서 읽어보면 지금까지의 접근에서 조금 방향을 바꾸어 볼 수 있는 힌트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기본적인 문단 나누기 실력만 있으면 충분하다.

성경의 장과 절 구분이  1500년대 주로 인쇄업자들에 의해 작업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주어진 본문을 다시 자세히 읽고 문단 나누기부터 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본다면 본문은 10절에서 한번 끊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발견한다. 11절부터의 내용은 5~10절까지의 내용과는 다른 관점과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누어진 첫번째 문단을 다시 읽어보면, 다시 몇가지 내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vv. 5~6       파송의 대상에 대하여

vv. 7~8       파송 받아 가는 제자의 사역(해야 할 일-핵심 사역)

vv. 9~10     파송 받아 가는 제자의 사역 기본 틀(Basic pattern)


파송의 대상에 대하여(5~6절)


조금 전에 이 부분을 다루고 있었기에 이어서 조금 더 생각해보자.

본문에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고 하시기 전에 먼저 언급된 2개의 대상이 있음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즉,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2개의 대상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서로 대조되고 있다.

이 대조에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이것이 배타적인 파송 장소 설정과 관계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방인의 길'은 아마도 팔레스틴 지역에서 이교도들이 거주하는 어떤 헬라 도시로 통하는 도로를 의미할 것이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은 평소에는 잘 지나다니지 않고(애써 피해가는) 명절을 당하여 시간이 촉박할 때 지름길로써 지나가던 곳이다.


반면에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는 표현은 구약적 표현 방식인데, 이사야 53:6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예레미야 50:6 "내 백성은 읽어 버린 양 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언덕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 겔 34:5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라는 구절들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세가지 표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선명도이다. 셋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분명한 대상이고 어떤 것이 가장 불명확한 대상인 것 같은가!

자칫 생각하기에는 예수님께서 파송 받아 가는 제자들에게 어떤 좁은 대상(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갈 것을 허락하시는 다소 편협한 선교정책을 펼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펼쳐놓고 다시 들여다보면 그 생각에 문제가 있음을 곧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 셋 중에서 가장 좁은 범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 가장 보편적이고 범위가 광범위한 대상이라는 점이다.

세계화된 지금의 시각으로 볼 것이 아니라, 현재 이 명령을 받고 있는 제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러한 이해는 더 분명해 진다.


파송 받고 떠날 준비를 하는 12명의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은 너무나 뻔하고 확실한 대상이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콕 찍어서 '너는 이쪽으로만...'하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얼마나 명쾌한 일이겠는가?  파송 받아 떠나는 입장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막막한데, 예수님께서 족집게 강사처럼 '넌 이쪽, 너는 저쪽 저 사람들'이라고 정해주신다면 한시름 더는 일이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파송의 대상을 정해주시지 않으신다.  소명 받아 살아가는 우리들을 마치 로봇 다루듯이, 노예나 하인 다루듯이 자신의 성가신 일을 한몫 뚝 떼어내어 네가 감당할 것은 이것이야 하며 우리를 한정 시키시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내 지쳐 버릴 것이고, 소모품이라는 인상 때문에 지겨워질 것이다. 어느 순간인가 소명의식(Calling)은 약화되어 방황하며 믿음을 잃어버리는 최악의 경우도 경험할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언제 지치는가를...

일이 많고 버거워서 지쳐 쓰러지는가 아니면 왜 이 일을 내가 감당해야하는지 그 이유를 모를 때 지쳐 쓰러지고 주저앉아 버리는가!

아무리 힘들어도 왜 이 일을 내가 해야만 하는지... 그리고 이 일을 감당할 때 내가 책임져야 할 이들을 섬길 수 있는 길이라 확신할 때는 대개 우리는 버틴다. 몸이 부서져라싶어도 자식 굶주리지 않고 교육 시키고 반듯하게 키워내는 소명 의식이 분명할 때는, 골백번 더 때려치우고 싶어도 그리고 어떤 인간적인 모욕을 당해도 지레 포기하지 않고 눈 찔끈 감고 버텨낸다.  이는 소명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는지... 왜 이 일을 감당하며 수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없을 때는 너무나 어이없이 내려놓고 만다.

나 자신의 가치와 힘겨운 현실을 버티게 하는 것은 내가 로봇처럼, 사용되고 나면 아까울 것 없이 다른 누군가로 대체되리라 여겨지면 온몸이 힘이 쭉 빠지고 의욕을 상실하게 된다. 일을 해도 즐거움이나 가치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 사는 것 같을 뿐이다.


파송 받아 가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을 소모품처럼 다루시기를 원치 않으신다.  예수님은 파송 받아 가는 그들을(우리들을)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 부르시고 삼고 계심을 먼저 가슴 깊이 새겨주시고 계심이 이 첫 부분의 제대로 된 역할이다.


예수님과 동일한 사역의 연장선 위에 제자들을 초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냥 귀찮은 한몫 떼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는 정해지지 않은 대상, 너무나 광범위하고 막막한 세상 그러나 결코 기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사역 그 자체에 그대로 동참하여, 예수의 마음과 동일한 마음을 품었을 때에만 보이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영혼에게로 보냄 받는 동역자임을 고지하시는 것이다.



파송 받아 가는 제자의 사역(해야 할 일-핵심 사역)  vv. 7~8


7~8절에 가면 이 점은 더욱 더 분명해진다.


파송 받은 제자들의 사역이 예수님의 사역과 동일(비슷한 것이 아니라)함을 고지하신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 하나님의 임재(임마누엘)에 있으므로 즉,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열심 가운데 동참했음을 확인시키심이다.

1절에서 예수님께서 그의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심은 그 시대 상황 가운데 주님의 파송 받은 제자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데 중요한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가장 절실한 필요가 더러운 귀신, 모든 병 그리고 모든 약한 것으로 대변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그 시대의 문명을 헤아릴 수 있다.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의 영적 환경이라는 것은 온통 종교적 제의적 희생과 권력의 각축장이었다.  이는 그 시대의 어쩔 수 없는 모습이다.  자연법의 정립 시기였기 때문에 이성에 근거한 통치나 권리의식 같은 것은 거의 전무했을 것이다. 그로인한 각종 권리의 침해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며, 신정 일치 체제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며 운명론적 미신에 젖어 살게 하는 시대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의 사정도 그렇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는 예수님의 표현(구약적 표현의 정점)에서 알 수 있듯이, 심각한 신학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된 여호와 신앙은 거의 명맥만 유지하는 처지였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믿음의 소망은 마치 헛된 바램처럼 짓밟히고 무시되었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그저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과 혼합주의 만이 득세한 형국... 그것이 당시의 이스라엘 모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이 시기의 이스라엘에 대해서 너무 큰 환상을 가지면 곤란하다. 선지자 없이 지낸 그 막막한 수백년의 식민 세월... 이 당시 우리 역사의 중요한 사건은 고구려가 도읍을 국내성을 옮기었고 신라에서 쟁기와 보습이 농사에 시작되던 시기이다)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지만, 이 시기의 귀신들림과 병마들 그리고 약한 것들에 대한 민중들에 대한 지배력은 가히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특별히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이라는 대상을 향하여 임마누엘의 전혀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으로 사역하신 그 모습 그대로, 동일한 모습으로 사역의 현장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계시는 것이다.

귀신에 억눌리고 폭력에 억압받음으로 말미암아 마치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그 희망 없는 영혼들을 향한 임마누엘 예수님의 힘찬 데모의 행렬에 그 제자들을 동참시키시는 것이다.



파송 받아 가는 제자의 사역 기본 틀(Basic pattern)   vv.9~10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본문의 세번째 부분은 단순히 파송 받아 가는 제자들의 복장규정이나 여행에 있어 지켜야 할 수칙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기능만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소명의 일꾼인 제자들이 뭐 아이들도 아니고, 주머니 검사해서 먹을 과자 하나 더 챙겨간다고 혼내시고, 용돈 좀 챙기고 여벌 옷하나 더 가졌는지 소지품 검사함으로 일장 연설하신다면 분명 잔소리꾼에 불과할 것이다.


본문은 바로 앞부분과 비교됨으로 그 가치를 발하게 된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과 동일한 연장선 위에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하셨다.  그것은 이세상의 가치로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 운동, 생명의 역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곧 여기서는 대조되며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착각을 가져오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무슨 말씀인가?


빈털터리로 가라. 심지어 가장 기본적인 준비물도 갖출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다 공짜로 공급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공짜 좋아하는 거지근성을 가져라는 것인가?  앞에서는 거저 받은 복음을 거저 주는 척하고, 나중에 뒷문에 돌아서서 ' 이 좋은걸 줬는데 뭐 없어?'하라는 것인가?  이것도 아니라면, 거저 받은 복음이 감격스러워 자발적인 섬김과 채움을 공급받으라는 것일까?...


본문은 하나님의 부르심(소명. calling)에 분연히 일어선 제자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도전이 담겨있다.


그들은 아직 여물지 못한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즉 예수님의 민망한 마음을 품고 자원함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달려 나가지만, 정작 임마누엘의 은총을 그들의 삶으로 경험하지 못한 초짜들이다.  그들이 품고 나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가 가진 폭발적 권능에 아직은 무지한 자들이다.  정작 자신들은 예수라는 낯선 젊은 사내에게 어떻게 이끌려졌으며 그에게서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의 새롭고도 독특한 그 영적 권세에 압도당함으로, 그들도 임마누엘의 은총을 누리는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지만, 아직 그 권세의 영향력이 어떠함을,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엡3:19).


바울의 기도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하나님의 일꾼으로 파송 받아 간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제자들이 온전해졌고 주님의 일꾼다운 당당함과 충실함이 채워졌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온전히 이루었기 때문에 파송 받아 가는 자들이 아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파송 받은 제자들은 그의 파송 받아 가는 삶의 자리에서 임마누엘의 놀라운 권세를 맞닥뜨리게 될 것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가는 것을 그들 자신도 경험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거지 근성을 길러 얻어먹음이 아니라,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들과의 만남과 교통을 통하여 스승과 제자 혹은 예수 안에서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할 때, 서로가 예수 안에서 몸의 지체임을 깨달아 마땅히 서로 섬기고 섬김 받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라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바라보시며 소망을 나누시는 것이다.  새로운 권세의 사역을 통하여  제자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놀랍게 발견하리라는 것을 바라보고 계시는 것이다.


파송설교 첫 부분은 예수님의 소망이 담겨있다.

파송지역, 대상에 대해서 혹은  여행 떠나는 제자들의 복장상태나 행동요령에 대한 구체적인 간섭이 아니라, 길 떠나는 제자들이 가슴에 품고 가야할 소명자의 정체성이 더욱더 확고해질 것에 대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소모품으로써의 고달픈 나그네 여정이 아니라, 가면 갈수록 더욱 더 진기한... 믿으면 믿을수록 그 넓이와 깊이에 압도당함으로 감격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확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소유함으로 천국의 소망이 더 풍성해지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우뚝 서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주님의 숨결이 담겨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문 닫아 걸고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친히 깊숙이 들어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하시며 옅은 한숨 내쉬던 그 마음, 그 바램...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