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장은 기다리라는 명령 가운데 온전히 기다리지 못하고 일을 저질러버린 연약함의 보고로 시작된다. 그런데 사실상 이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사도행전을 믿음의 경전으로 삼고 따라가는 우리들에게는 위로와 소망이 된다.
흡사 남 잘되면 배 아프고 실수하면 고소해하는 소인배 심보 같지만, 실상이 그렇다. 만약 성령행전인 사도행전의 첫 시작부터 거의 완벽한 주님의 12제자들의 거룩하고 경건하고 완벽한 모습만으로 시작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또 한명의 제자로서 기가 팍 죽었지 싶다.
나는 실상 경건과는 거리가 있고, 완벽하고 멋진 믿음의 여정과는 상관없는 듯한 인생살이로 점철하는 그저 그런 평범한 범부이기에...
그들의 아름답고 멋진 영성을 닮아가야지 하는 굳은 결의보다는 '쟤들이니깐 저렇게 살지... 우리는 그렇게 못살지..아무렴...'하는 자조섞인 넋두리와 제풀에 주저앉는 의지박약을 드러낼것이 여러모로 분명하기에... 고개가 폭 숙여졌을게다.
그런데 정말이지 너무나도 다행(?)스럽게도 나와 별다를바없는 연약함과 실수가 드러나는 아찔함, 그리고 그럼에도불구하고 뭘 잘못하고 있는지도 잘 깨닫지못하는 천연덕스러움이 너무 너무 큰 위로가 되고 감사하기까지 하다.
예수충만은 실로 나와는 관련이 없는 사항이지만, 성령충만은 12제자 이후로 모든 예수 제자들의 공통 관심사이며, 주님의 명령이기에 민감할수밖에 없는 믿음의 아킬레스건과 같다. 이런 주제가 만약 완벽하고 온전하기까지한 제자들-예수님과의 3년간의 고강도 과외와 예수님과의 밀접한 교통(예수충만)-과 초대교회의 몇몇 집사들-사도들에게 직접 사사받고 함께 사역한-에게만 국한되는 사항으로 인식된다면, 그리고 작금의 교회 내에서도 몇몇 특별한 직분의 사람들이나 어떤 은혜 많이 받아 약간 오버(!)하는 경향이 짙은 분들의 전유물과 같은 느낌의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성령충만에 대해 관심을 꺼버리거나, 단지 영적 로망, 혹은 가끔씩 개최되는 수련회나 애써 찾아가는 기도원 집회 같은 곳에서 6개월 혹은 3개월 약발을 기대하는 정도의 성령 부스러기 주워담기에 족하다 여길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가 당연하다고 스스로 타협하며 그렇게 별문제없이 살아갈것이다. 일상의 삶에서 성령충만은 사치라고 여기면서...
이런 상태로 살아온 우리들에게 사도행전 1장은 새로운 관심을 열어준다.
'어라! 예수충만(예수님과의 3년간의 동거동락)을 경험하고 살아갔던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집사들도 나랑 비슷하네... 웃기네!'
'나만큼 실수하기도 하고, 그 실수를 깨닫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가기도 하네... 우와~'
'주님의 말씀을 잘 이해못하고 늘 뒷북치는듯한 내 모습이 그들에게서도 발견되는구나... 나만 그런것이 아니군!'
'이런 사람들이 성령충만의 주역들이라면, 나도 희망이 있겠구나... 성령충만이 그렇게 어렵고 이상한것이 아니라 이처럼 부족한 내 삶에 꼭 필요한 요소들일수있겠구나... 기도원이나 집회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닌 내 삶의 필수요소, 나를 지탱해주는 믿음의 길이겠구나...'
1. 기다릴것을 명령하심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40일의 기간동안,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당황스러움 가운데 부활을 이해하기 바빴을 것이다. 예수님의 많은 증거들 앞에 마음을 추스린 후에,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어쩌면 3년간 주님의 말씀에 주목한 것보다 더 열심을 기울여 주의 말씀을 경청하였을 것이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가치가 있는 것처럼,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배우고 들었던 말씀의 단편들 그리고 이해되지 않았던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들어가는 기회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며 공생애를 준비하셨던 그 열정으로, 지상에서의 마지막 40일을 채워나가셨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시기 얼마쯤 전에 다시 사도들을 모이게하시고는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명을 전하신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내가 강조하며 가르친것을 명심해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것이다.'
이 명령의 초반부에 있는 두가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것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것-는 결국 같은 말이다. 기다림에 대한 당부이다.
왜 기다리게 하셨을까? 우리는 지금의 관점에서 볼때, 그들은 부활후 50일만 기다리면 되었고, 그 날수는 의미있는 절기와 상당한 관련이 있음을 알고있다. 그렇지만 당시 제자들의 입장에서 이 기다림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몇날이 못되어...'라는 단서로 봐서는 금새 기다림이 끝나는, 그렇게 길지않은 기간일것이라고 느꼈을 것같다. 짧지만 분명치 않은 얼마간의 기간...
이 기다림을 제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모습으로 기다렸는가를 제대로 헤아리기 위해서는 그 기다림 끝에 무엇이 약속으로 주어지고 있는 가를 봐야한다. 주님께서는 그 기다림의 끝에 주어지는 약속은 '요한의 물세례와 비교되는 성령 세례에 대한 것'이었다.
이 약속이 제자들을 어떻게 사로잡고 있는가가 중요한 관전 포인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있어서 이 약속이 우리 신앙의 발걸음을 어떤 식으로 인도하고 영향을 미치는가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의미있다.
그래서 여기서의 기다림(기다림 가운데 나타나는 신앙의 삶)은 나름 중요한 것이다.
성경에서 기다림의 영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 다루어진다.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기다림' 훈련은 고비마다 빛을 발한다. 기다리지 못할만큼 유혹적이고, 조금더 기다리기엔 너무나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 가운데 그들은 길러지고 세워지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있다.
소망이 끊어지고 약속이 희미해지기까지 기다린 아브라함...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될때까지 한없이 후회하며 이해되지 않는 세월의 한가운데를 지나야 했던 모세...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 앞에서 기다림의 능력을 잃지 않았던 다윗...
...
제자들은 약속앞에, 그것도 한 며칠만 기다리면 되는 약속 앞에 기다릴것을 명령받았다. 믿음의 선진들이 명령받아서 기다리던, 얼떨결에 기다리던 간에 하염없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실때까지 정체된 삶을 견디어 냄과 같은 연장선 위에 드디어 선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작은 차이점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약속에 대한 것이다. 물론 앞의 믿음의 선진들에게도 하나님은 희미한 약속을 주셨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은 너무나 선명한 약속이었다. 그것도 비교가 있는 약속이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
요한의 물 세례
요한의 물세례가 예수님에 의해 제자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졌을까? 제일 궁금한 점이 바로 이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의 제자들로써 부활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정확하게 알수있을까! 이와 같이 우리의 접근은 제한적이긴 하지만, 나름 몇가지 점을 짐작해 볼수는 있다. 그것은 이런 예수님의 비교가 제자들에게 어떤 뉘앙스로 다가왔을까하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는 당시의 율법 사회에 있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메시지였다.
메시지의 내용에 있어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만큼의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오랫동안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다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더 관심을 끌었다.
놀러나간 아이가 오랫동안 행방을 모르고 늦도록 들어오지 않으면, 온갖 걱정 가운데 하염없는 기다림에 마음을 졸이지 않는가... 그러다가 멀리서 오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기라도하면 무슨 말, 어떤 꼴이어도 얼싸앉고 맞는 것은 간절히 기다려 본 사람만이 누리는 감격이요 기쁨이다. 그가 흙투성이 만신창이라 해도 괜찮지 않는가.. 기다리던 바로 그 사람이라면...
세례 요한은 이처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만난 그 사람이었다.
마지막 선지자가 사라진후 그야말로 수백년의 세월이 흘렀다. 유대인들은 그동안 몇세대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선지자다운 선지자를 만나지 못했었다. 그저 부모들에게 전해져오는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할뿐, 그들의 실제 삶은 하나님의 부재였다.
400년 세월의 무게를 나는 도무치 헤아리지 못한다. 기껏해야 100년 세월도 못사는 주제에 곱절의 곱절을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나의 당부를 400년 후의 내 자손의 자손의 자손...이 제대로 듣기라도 듣고, 기억이라도 제대로 해줄라나... 우리 역사는 기껏 5~60년의 역사도 왜곡되고 수많은 갈등의 현장으로 피비린내 나는데... 유대인들이라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렇기때문에 요한의 세례 운동은 그것이 '무엇이건간에' 선지자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기때문에 충분한 관심을 끌기에 일단 유리했다.
사실 세례를 받았던 당시의 수많은 유대인들이,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연구한 결과로 이야기되어지는 그런 엄청난 의미와 파격적인 도전에 이끌려나와 세례 받았다고 보기엔 사실 어려움이 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채워주심, 만나주심 그리고 만져주심 "이라는 현실앞에 감격하고 또 감사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이야기로만 듣던 하나님이 드디어 자신의 백성들에게 다가오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했다.
어떤 내용을 담고 왔는가하는 것은 둘째 문제라는 것이다.
우선은 감격하고 울고 볼일이다. 정신없이 매만지고 쳐다보고 뺨을 부비는 것만으로... 돌아와서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 함께 하고 있음만이 눈에 들어오지,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무얼하고 다녔는지 혹은 어떤 선물을 가져왔는가하는 것은 일단 감정적 복받침을 어느 정도 해소한후에 돌아볼 일들이다.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의 등장에 들떴다. 듣기만 듣다가 눈으로 보는 욥의 감격을 그들도 누리는 것이다.
서릿발 날리듯 매서운 그의 매시지도 정겹게 느껴질만큼...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요한의 세례와 메시지가 선물의 핵심이 아니라, 그는 다만 오실분의 길을 예비할 따름이라는 전혀 뜻밖의 소식앞에 다소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지금껏 기다렸는데 또 기다려야 한다니...
세례요한의 뒤를 이어 오실 분의 신발끈도 풀어들이지 못할만큼의 작은자임과 작은 영적 운동임을 스스럼없이 공개적으로 밝힘을 통하여, 세례요한의 세례운동의 의미는 더 주목받고 의미있게 해석될수있었다. 이 사실을 모를때는 그저 그가 선지자이고 하나님이 보내주셨고 반가운 마음과 흥분으로 미처 그의 행동이나 의미들을 따져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비교"가 생기면 그때부터는 비교 대상과 비교 당하는 것과의 유비를 가능케한다.
정신차리고 보니깐 실로 놀라웠다. 멋모르고(전혀 의미없이 아무 생각없이 세례 받고 요한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겠지만...) 지켜볼땐 그저 그럴려니했는데, 다음에 이어 오실이의 영적 운동에 비하여서 자신의 영적 운동(세례)은 새발의 피라고 하니깐, 비로소 요한의 세례 운동을 제대로 평가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의 세례 운동은 한마디로 영적 파격이었다.
그냥 요단강에 나아와 하나님의 보내신 이 앞에서 세례만 스스로 베풀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다. 당시엔 요한이 직접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요한은 앞에 섰고 나아온 사람이 스스로 침례를 행하는 방식이었다. 단지 하나님 앞에서의 작은 결단과 움직임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파격의 현장이었음을 느꼈을때 유대인들이 가졌을 전율은 대단한 것이었을 것이다. 어떤이는 감격했을 것이고, 어떤이들은 분노했을 것이다. 그 반응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실상 앞선 어떤 선지자 행세하던 이들이나 몇몇 거룩한 공동체에서도 세례가 주어진 경우가 있었다. 그런 경우에 있어서 지금 요한의 세례와 다른 점은, 하나님의 보내심이 현실인가 아니면 그저 흉내내거나 소망하는 경우인가라는 점이다. 그들중 많은 이들은 거룩했고 간절했다. 그러므로 율법의 방법이나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더이상 어떤 변화를 일으킬수없음을 잘 알았기에 하나님의 손길을 더더욱 갈구했다. 그 방법과 표현 가운데 하나가 세례의 방식이었다.
실상 세례는 나의 방법을 포기하는 것, 나의 생명을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살려주심을 바라는 소망의 한 표현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더이상 나의 것, 나의 방식, 나의 목숨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수없음을 고백하는 삶의 정황에서 나오는 영적 몸부림이 세례 운동으로 나타난것이다.
이처럼 기다림 가운데 세례 운동은 그들의 거룩한 삶 가운데 열매로 나타났다.
기다림은 때로 포기라는 열매로 결론나기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기다림은 하나님 만을 기다리게 하고 하나님의 방법 만이 나를 살리고, 하나님의 손길만이 나의 상황을 변화시킴을 뼛속까지 고백하게 되는 열매이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적인 온갖 방법들과 별별 시도, 마지막 최후의 수까지 다 동원했지만, 그냥 제자리이거나 오히려 더 비참해지는 연약한 상황들을 마주하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할수있는 것이라고는 뭐가 있겠는가! 그저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며 거룩해지는것 뿐! 모세처럼 늙고 지치고 머리가 텅비어 백지장처럼 연약해짐으로 지면에서 가장 온유해지거나, 다윗처럼 욕먹고도 울컥하는 마음을 배설하지 않고 도리어 묵묵히 참아냄으로 결국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대신 나서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경지까지 다듬어지는 것!
뭐 달리 별 다른 선택이 없는 현실 가운데서 될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나, 아니면 결국 하나님만이 이 현실의 사태를 바꾸어 가실 유일한 대안으로 고백함으로 점점 더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기다리는 세례의 공동체로 버티는 것! 이 두가지 선택 밖엔 별다른 길이 없었다. 기실 우리네 삶도 비슷하다. 이러나 저러나 별 다를바 없는 내 삶에서 되는 대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과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셔서 인도하실것을 바라며 점점 더 거룩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삶이 그것이지 않는가!
요한의 세례는 이와 같이 비참한 현실, 변할것 같지 않은 세상, 로마의 무력앞에 속수무책인 조국의 암담한 시대 가운데 빚어진 거룩한 영적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어쩔수없는 암담한 현실 앞에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고해서, 죽기살기로 우쨌든동 하나님 만이 우리의 살길이다싶어 거룩한 삶을 작정했고, 그 작정한 믿음의 결단이 더이상 나에게서 우리에게서는 나올수없고, 오직 하나님께로만 나올수있음을 고백하는 의식 또는 운동으로써의 세례가 전혀 헛다리짚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하나님의 선지자,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도 세례 운동에 동참하더라는 것이다.
그냥 고단한 가운데 그래도 올곧게 하나님 바라고 살자싶은 마음으로 믿음 운동을 벌였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승인을 받은 셈이고 또한 하나님께서도 바로 그 방법 외에는 달리 역사하실수없는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천명하신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이다.
이점이 놀라웠다. 유대인들도 이미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죽지 않고서는, 거듭나지 않고서는 다른 무엇으로도 달리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 은연중에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런 맥락에서 때가 찬것이다. 억지로 하나님께서 이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편이다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봤자 별 실속이 없었을터인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달리 설명치 않아도 내 믿음의 삶에서, 내 답답한 현실의 삶에서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로 때가 찼고 주님의 오실 준비가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바로 이런 점에서 주님의 길을 온전하게 준비하고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요단강에 서 있는 세례요한
그리고 줄지어...줄지어 나의 죄속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숨쉬기도 눈뜨기도 어려운 물속에서,,,보이는 희끗희끗한 나의 현실...
그리고 큰숨 내쉬며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살았다~~~ 이제 살았구나, 아니 이제사 사는구나...
물세례의 기쁨을 이 아침에 누려봅니다...
또한 성령세례의 큰기쁨을 기대합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