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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송설교 - 이 험한 세상, 주님 없이 어떻게 살라구...
2. 파송설교의 첫번째 메시지(마 10:5b~10) ; 사역의 본질 / 예수님의 옅은 한숨소리 
3. 파송설교, 그 두번째 메시지(마 10:11~15) ; 개털모자냐 황금면류관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4. 파송설교, 그 세번째 메시지(마 10:16~23) ;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5. 파송설교, 그 네번째 메시지(마 10:24~33) ; 어떻게 삶이 복음인가?

 

 

 * 파송설교, 네번째 메시지(마 10:24~33) ;  어떻게 삶이 복음일 수 있는가?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이제 본문의 말씀은 세가지의 영적 현실을 언급한다.

영적이라 표현했지만, 실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상황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이므로 다분히 세속적이다.

상당히 멋진 표현인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으로 요약되는 우리네 삶의 현실이다.

 

본문의 이해를 위해서 먼저 헤아려야 할것이 있다.  다름아니라, '영적이다'라는 표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위험성에 대한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 있어 흔하게 듣고 접하는 말이 영적인 삶 또는 영적 분별 등이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변하는 아주 영적 은사를 가졌다고 한다. 누군가는 영적인 능력이 뛰어나 그에게로가면 많은 것이 해결받기도 한다는 소문을 듣는다. 또는 누군가는 아주 영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곤한다.

그 비슷한 표현으로 '영성'이라는 단어도  심심찮게 듣는 말이기도하다.  영성이 뛰어나다, 영성이 맑다, 영빨(영성의 완곡어법)이 떨어졌다 혹은 세다 등등...

 

그래서 간혹 신령한 사람 혹은 영성이 매우 강한 사람이라고 소개받은 이를 만나면 괜시리 주눅이 든다. 혹시 이 사람이 나를 간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괜스리 주절주절 뭐라도 털어놔야 할것같은 묘한 압박감도 시달린다. 나와 같은 부류라기 보다는 뭔가 우러러봐야 할 것 같고, 뭔가 차원이 다를 것 같아 친밀감을 형성하기가 어렵다.

 

왜 영적인 것에 사람들은 이토록 큰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것일까?

예수님이 영적인 삶을 살다 가셨기 때문에 그런것일까? 아니면 현실이라는 고단하고 단조로운 일상의 파격이 일어난 것에 대한 열광일까?

아니면 혹시 영적인 삶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지 못한채, 그저 영적 실체에 대한 과도한 환상 때문일까?

 

우리는 영적인 삶에 대한 환상이나 열망이 학습되어 있다.

막연하게 그것은 좋은 것이고 추구해야 할 바이며, 영적인 삶에 대한 관심을 확대시켜 가야 한다고 확신한다.

누군가의 삶에 어떤 영적 기적이나 현상이 집중되는 것을 보면 부러움과 두려움을 함께 가진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 현상의 기저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기사들과 초대교회 사도들이 보여준 다양한 이적들 그리고 성경에 언급된 많은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임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수있고, 그렇기도 하고 그리고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글에서 먼저 분명히 하고자하는 바는 '영적인 것들에 의해 우리의 눈이 가리워지지 않기!'이다.

영적인 것에 대한 이러 저러한 환상과 생각 그리고 의견이 너무 많고 다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심각한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정말 영적인 삶을 살려고 한다면 '먼저 현실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문제를 안고있었던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권면하고 가르치는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바로 이점을 우선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5장부터 언급되는 교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의 시작이 바로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음행-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사건'에 대한 것이다. 사실 그 본문에서의 핵심은 교회 내에 음행이 없어야 한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먼저 언급한다. 이런 일은 이방인 중에서도 잘 일어나지 않는 일 혹은 용납되지 않는 사건으로 먼저 규정하고 있음이다. 이 말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새삼 별다르게 언급하지 않아도 사실이지 않는가.  이방인 중에도 없는 음행이라면 교회 내에서 없어야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 않는가!

 

 바울이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상식적인 현실이 정작 교회 공동체 내에서 너무나 비상식적으로 처리되거나 혹은 발견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이방인 중에서라도 없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는 이 사건의 핵심은 정말 황당한 사실이다. 누군가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범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심각한 이유는 이 사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음란성의 경중이 아니다.  이 황당한 사건보다 더 어처구니 없는 심각성은 이런 사건이 교회 공동체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그냥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냥 눈감고 봐준것인지 혹은 진짜로 문제성이 있다는 사실 조차 감지하지 못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점은 그 당사자가 교회 내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었거나 혹은 굉장히 신령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커다는 것이다.

즉 '저분이 저런 일을 했을때는 다 나름 이유가 있을꺼야~'  '저렇게 신령한 믿음을 소유한 분이 그렇다한다면 뭔가 깊은 의도가 있거나 작은 실수이겠지~'  '어떻게 감히 저분을 우리가 어떻다 저렇다 할수있단 말인가~'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냥 묻혀 지나쳤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이런 이유로 대부분 묻어버리고 쉬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기있게 칼을 들여대는 개혁을 시도할라치면 너무나 거대한 (어디다 손을 대야 할지모르는) 담합 앞에 무너져 내린다.

 

바울의 고린도 교회의 개혁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방인 중에서라도 없는 음란 사건' 에 대한 시시비비가 아니라, 왜 이런 사건이 은폐될 수 밖에 없고 또한 마치 아무일도 아니란듯이 넘어 가고 있는가하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개입인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영적 폐해를 지적한다.  영적인 열광과 관심이 현실을 가리워 버리고 있다고...  또한 진정한 영성은 영적 세계를 잘 보고 헤아림으로 말미암아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헤아릴때 비로소 건강한 영성이 세워져 간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처럼 '영적이다 혹은 영성'에 대한 관심은 때때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그릇된 렌즈 역할을 할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보고 판단하는 사안에 있어서, 자칭 영적 세계를 보고 헤아린다는 사람들이 남들 다보는 것들에 대해 전혀 엉뚱한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은 건강한 상태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다.  건강하고 균형잡힌 상식을 뛰어넘은 영성이어야 의미가 있음이다.  건전한 상식 선에 못미치는 탁월한 영성이란 없다.

 

1. 첫번째 영적 현실 - 정작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지조차 헷갈리는 상황...

 

파송받은 제자들이 맞닥뜨릴수 밖에 없는 현실은 만만치 않다.

행여라도 성령께서 그들이 가야 할 길에 만날 모든 대적을 평토장하신듯 탄탄대로가 기다릴것이라 기대한다면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영웅적인 간증들이 너무 많고 흔한 까닭에 어떤 착각 혹은 최면 같은 것에 걸린듯하다.  주의 이름으로 나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며, 우리네 삶은 축복받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번듯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는...

 

꼭 그렇지는 않다. 그럴수는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특별한 것이 대중적이며 보편적이라 여겨서는 곤란하다. 철학적 오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쉽게 수긍할수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이 먹혀들지 않는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 들이기보다는 뭔가 섣부른 기대를 안고 접근한다. 결과적으로 승리하신 주님을 깃발 삼다보니, 그 과정에서 곤란을 당하신 현실이 희석된 것이다.

 

우리네 파송받은 삶에 있어 피치 못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현실이라는 과정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현실이 결과가 아니고 과정이라는 것이 다소 위안이 될뿐, 어렵고 고단하고 지지부진한 현실은 우리가 겪어야 할 몫이다.

예수님은 온전히 몫을 채우셨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고통과 번민 그리고 좌절로써 온전히 경험하셨다. 그분의 생애 자체가 지대한 연구꺼리가 될 정도이다.

 

사실 초대교회에서 이러한 인식이 자리잡기까지는 어느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바울과 그의 서신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까지 예수에 대한 이해는 주로 십자가에 한정되었다.  즉 다시 말하면, 초기 약 60년경까지 예수에 대한 이해와 복음의 이해는 그분 공생애의 정점이라 할수있는 십자가의 은총과 그 해석에 주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의 긴장 속에서 십자가의 은총이 어떠하며 그 구속의 역사가 가진 지난한 의미들을 해석하는 것에 온통 관심이 있었다.

 

그러한 복음의 해석 과정에서 어떤 반성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복음서의 출현이라 할수있다.

특별히 마가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알려진 마가복음서의 출현은 당시로서 아주 획기적인 복음의 해석이었다.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그러한데, 첫째는 구전의 복음 형태가 글로 기록된 형태로 정착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복음의 범위가 크게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사실을 요약해서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즉,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근 3~40년 동안 복음의 형태는 기록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예수님을 목격한 이들과 그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많은 사람들이 생존한 상태였기에,  얼굴을 맞댄 상태에서 행해지는 설교나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하다 싶을 정도의 내용을 접했을 것이다. 복음서에서 언급되듯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것에 대한 강력한 기대들이 동시에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또한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받은 탁월한 신학자이자 선교가였던 바울의 활동과 저술은 복음의 깊이와 해석에 있어 상당한 매력을 동시에 제공하였기에 별다른 예수님의 생애나 당시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거나 보관하고자하는 시도들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변화가 왔다. 목격한 증인들의 연이은 부고와 곧 오시리라는 말씀의 해석이 달리 이해될수있다는 깨닫음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새로운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바울도 종종 그의 서신에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냈다.  사역 초기부터 끊임없이 공격받았던 사도적 자질에 대한 그의 변명은 때때로 절박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생전에 직접적인 가르침과 교통이 없다는 점을 들어 공격할때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독특한 사도적 위임에 대해 설명하였다. 다메섹 길에서의 그 잊을 수 없는 부르심과 아라비아 사막에서의 비밀스러운 3년간의 행보가 어떻게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화시켰는가를 그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고 변명의 기회를 이용하여 적극 변호하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는 사도로서 부족함은 없지만, 한켠의 결핍(예수 생전의 교통과 가르침)이 가져오는 약점을 솔직담백하게 고백한다.  고린도전서 13:12에서 '지금은 내가 일부분만을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주님께서 나를 아신것 같이 내가 온전하게 알것입니다'라고...

이런 신학적 반성과 당시의 분위기로 인하여 서서히 예수님의 생애와 그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남겨야 할 필요성이 여러 복음서로 드러난 것이다. 그중에 제일 먼저 기록되었다고 알려진 마가의 복음서는 아주 중요한 당시의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형태가 다른 그릇에 담겨야 할 절박함과 복음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신학적 반성이었다.

교회 구성원의 상당수가 예수님의 생전을 목격하지 못했고, 구전에 의존한 복음의 가르침으로 인해 복음의 내용과 범위가 주님 사역의 최종 결과물인 십자가와 그의 부활에 집중됨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이원론적 신앙 행태가 문제되기 시작한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렇지않아도 당대의 지배적인 철학적 기반으로 플라톤주의가 성행했고,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플라톤 철학이 유용한 측면이 많았기 때문에 신앙 생활이 머리 따로 가슴 따로의 경향성을 가질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플라톤주의 : 육체와 영혼을 이분하여 영혼과 정신적인 면을 존중하는 견해를 플라톤주의라고 부른다.  플라톤은 이데아설을 제창하였는데, 이데아는 비물질적이며 영원하며 초세계적인 절대적 참된 실재로 보았다. 이에 반해 물질적이며 감각적인 존재는 잠정적이며 상대적이고 경험적이므로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정립하였다.> ***

 

초대교회는 이러한 신앙적 위기 앞에 복음서라고 하는 성령의 치료 처방전을 부여받은 것이라 할수있다.

특히 마가복음서는 복음서의 첫글에서부터 복음의 그릇이 바뀌었음에 대한 선언(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입니다)으로 시작한다.  또한 복음의 범주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공생애 사역 전체를 복음이라고 재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서의 도전을 통하여 이제 예수님의 몸짓 하나, 자그마한 행동으로 빚어지는 사건 하나 그리고 그분의 세세한 가르침 모두가 복음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는 별로 새로울것 없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도전이며 개혁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되찾은 소중한 것이 바로 현실, 영적 현실 - 제자로서 살아가야 하고, 예수님께서 살아가셨던 3년의 공생애가 비로소 의미있게 된 것이다.

 

이제 예수님이 경험하신 그 모든것이 복음이다.

예수님이 아파하시고 목말라 하시고 불편한 잠자리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여행을 감당하신 모든 과정이 의미있는 복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십자가 죽음, 부활과 동등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복음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사실상 우리는 결과 중심적인 영광의 신학에 환호하며 관심이 집중되기 쉽다. 잠시 잠깐의 고난이 있었다지만 이내 십자가의 영광에 가리워버림으로 말미암아, 과정은 희미해지고 결과는 더 선명해진 영광의 결과가 자랑스럽고 감격스러워 쉽사리 도취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려움이 오면 당황하게 되고, 부정하게 되고, 넘어지기 쉬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과정과 현실의 재발견은 이러한 편향된 신앙을 바로 잡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칫 영광의 신학에 빠져서, 파송받은 제자로 살아가면서 맞닥뜨릴 현실-우리 주님의 경험하신 그 현실-을 외면하거나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우리의 영적 현실을 제대로 직시함으로 그 가운데 피할길을 열어두신 주님의 좁은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대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송받은 제자가 맞이하는 영적 현실은 곧 우리도 만나게 될 상황이거나 지금 경험하는 상황일 것이다.  드러나는 양상이 좀 다를뿐, 본질은 같음이다.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본문에서 이르시는 첫번째 영적 현실은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고, 그 집사람들과 제자들을 핍박하고 괴롭히는 현실'이다.

 집주인이신 예수를 바알세불이라 지칭하며 왜곡했던 이들의 정체는 가히 카멜레온과도 같은 무리들이다. 서기관과 바리새파 유대인들로 구성된 이들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무엇이든지 조작할수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정치 그룹 중에서도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기때문에 유능하게 상황을 만들어내고 계략을 추진력있게 진행시킨다.

 

주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처럼, 이들은 예수를 바알세불이라고 선동하고 있다.

바알세불, 즉 예수가 귀신의 우두머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저런 기적을 행하는 일련의 일들이 매우 위험하고 벼랑끝으로 몰고가는 유혹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순진하게 예수를 따라가다가는 멸망의 길로 들어설수있음에 대한 선의의 경고를 발동하는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자신들을 포장하고 있다.  유대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악한 자의 유혹에서 분별력을 발휘해야 하는 지도자의 입장에서 최선의 책무를 다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이들은 전형적인 정치꾼들이다.  군중 심리를 아주 효과적으로 통제할줄 아는 사람들이다.  돌아가는 형세 변화에 그렇게 안절부절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형세를 뒤집거나 조작 가능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주 느긋하다.  바쁘게 조급함으로 일을 망치지 않는다.  아마추어가 아니라 진정한 프로들이다.

그러므로 안색도 하나 변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참말처럼 퍼뜨린다.  그러나 이들은 집요하다.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위협할 소지가 있거나 자신들의 범주내에서 벗어남으로 통제 불가능해질것을 예상되는 한에 있어서, 그들은 집요하게 방해물을 제거해 간다. 서둘지 않고 착실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한두번의 시도가 그들의 계략대로 먹혀들지 않았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는다. 당황하지 않고 좀더 적극적이고 치밀하게 다음 상황을 준비한다.

군중들의 대다수가 지금 자신들의 기대하는 것과 다르게 반응하며 환호한다 해서 걱정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형세가 바뀌면 무리들의 반응은 급변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대처할 만큼 지혜롭고 대응수단이 다양하다.  왜냐하면 기득권이기 때문이다. 갖은 모략을 적용할 전술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으며, 우월적 지위에 있음이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단지 바알세불이라고 몰아세우며 밀어붙이는 정도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그들은 예수를 결국 무리들에게서 유리시키고, 추종자들을 해산시켰으며, 예수를 제3자의 손을 빌어 당시의 가장 무거운 죄, 반역혐의로 십자가 사형을 당하도록 모든 상황을 통제하며 진행시킴으로 소기의 목적을 깨끗하고 완벽하게 마무리했음을 안다.  또한 자칫 뒷소문으로 말미암아 탈 날것을 대비하여 돈으로 사람들을 완벽하게 매수하여 그럴듯한 소문을 퍼뜨리게 하는 깔끔한 뒷처리도 돋보였음을 알고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이 현실은 순수함이 왜곡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됨으로 난처해지는 경우의 수가 너무나 많은 현실이다.

우리가 복음의 순수함과 열정을 품고 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삶을 진실하게 살고자 하더라도, 세상은 이 진심을 몰라주는 세대임을 말씀하심이다. 이 세대의 완악함은 그 당신의 세대와 크게 별단 다르지 않다. 언제든지 자기 마음에 들지않거나 자신들의 입장과 다를경우엔 번뜩이는 이해득실만이 평가의 잣대를 형성할 따름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고 고귀한 희생을 감추어버릴 것이며, 왜곡시킴으로 비꼴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일회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중력있게 지속적이며, 적당히 괴롭히다 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말살시키며 침묵시킬 정도로 잔인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흐트림으로 세상과 적당하게 동화될것을 요구함으로 안위를 약속한다.  사실 적당히 잘 믿으면 얼마나 사람 좋다는 말을 많이 듣겠는가!  세상의 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첨예한 믿음의 삶을 내려놓고, 적당히 교회 출석하며 믿음 생활하는 죽은 양으로의 삶은  고달프지도 그리고 번거럽지도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앞서 살펴본것처럼, 이리 가운데 보냄받은 양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성령 하나님과의 동행을 위한 에녹의 삶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을 의지함으로 주의를 기울여 예수님의 말씀앞에 부단히 섬으로 순결한 양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파송받은 제자의 치열한 삶을 포기하거나 살짝 내려놓는다면... 참 쉬울 것이다.

 

또한 이러한 유혹은 단회적이 아니라 살아가는 내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달콤한 제안들로 다가온다.  특히 파송받은 제자의 삶이 고달프고 힘겨울때면 영락없이 타협의 손길이 우리의 심령을 파고든다.  제자로서의 삶의 여정 가운데 뚜렷한 실적이 없거나 애써 진행하고 기도했던 일이 어긋나 버린 경우 더더욱 그러하다.  허탈한 심정 가눌길 없어 하는 순간,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하는 큰 울림이 우리를 짓누른다.

 

예수님은 승리하셨고 역사를 이루시는 충만하신 하나님이시며, 주위에서는 성령의 불같은 역사로 부흥이 일어나지만, 내 앞길엔 그저 일이 더 꼬이기만하고 무엇하나 속시원한 열매가 없음을 확인하며 실망하는 순간... 우리는 갈등한다.  '제대로 살고있는 것이 맞는가?'싶고, '뭐 이래?'라는 말이 불쑥 나온다.  '과연 예수님이 나를 부르셨기나 하신거야?'싶고, '혹시 내가 소명을 잘못 확인한것은 아닌가?'하여 방황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같고 종이 그 상전같으면 족하다'...

무슨 말인가?  여기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주목하기를 원하시는 어떤 처방전이 있다.  현실에 휘둘린 자신의 삶이 복음이 되게하신 삶으로의 초대라고 표현할수있다.  즉, 현실의 암담하고 두려운 상황을 만들어내고 조작해 낸 세력이 원하고 기대하는 바대로  반응하지 말고, 오히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역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고 담대해 질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조금 이해하기가 까다롭다. 하지만 듣고나면 다 알고 있었던거네...할 것이다.  잘 이해하고 있어야 우리의 찌들린 현실의 삶이 복음이 되고 소망이 되며 진실로 의미있는 삶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음이다>

 

세상의 질서는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고,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다.  일반적이다.  특별한 이변이 없는한, 이 설정은 유지되어야 하고 유지될것이다.  이 관계 속에서 도덕이 형성되고 사회 위계 질서가 확립된다. 사회는 이러한 설정을 바탕으로하여 계약 관계가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효율적이며 질서 잡힌 공동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런 질서가 때로는 시민혁명이나 급격한 사회적 변화에 따라 새롭게 정립되기도 하지만, 그 모습과 양상이 조금 바뀔뿐 그 토대는 여전히 새로운 신분과 종속이 그 기반이다.

 

이러한 세상의 기본 질서를 유지 혹은 강제하는 것이 바로 기득권이다.  어디에나 있다.

사회 조직 속에도 있고, 무형의 학문 세계에도 있다.  그 사회나 조직 내에서 텃밭을 일구어낸 공로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좋게 말하면 질서이다.  그런데 이 질서를 반하여 도전하는  것이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기득권을 형성하는 이들의 반발이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다툼이 일어나고 새로운 질서가 짜여질때까지 한동안 시끄러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텃밭에 완전히 이질적인 하나님 나라가 침투해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반발을 부를 수 밖에 없다.

특히 유대인들의 철옹성과 같은 질서와 규범 그리고 영적인 권세까지 헤아린다면 가히 그 텃세는 대단할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현실 가운데로 들어 서셨다. 우리가 파송받아 살아갈 현실도 별반 다를바 없다. 모양새만 다를뿐이다.

 

이러한 세상의 잘 짜여진 조직속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신다. 그것이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과 같다'는 것이다.  종속이 아닌 하나됨, 일치를 말씀하신다.  어떻게 보면 전혀 새로운 가치와 질서인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다.  전혀 낯선 선포라고 할수있다.

 

이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도전이 된다는 것일까?  어떻게 이것이 이 세상을 주도하는 시대정신이나 기득권의 반발 앞에 두려워하지 않는 비결이라는 것인가?  달리 표현한다면, 어떻게 이러한 모습이 복음이 된다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실패가 있고, 실패의 와중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기간동안 그리고 마지막 생애의 모습에서 철저하게 낮아지고 실패하는 삶을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3년동안 공들였던 제자들은 배반하여 팔아넘기고, 자신을 저주하며 돌아서며 대부분은 뿔뿔이 도망치고 말았다.  그렇게 이루시기를 원하셨던 모든 일들이 하나도 제대로 된것이 없어 보이며, 그 자신도 당시의 가장 극형이랄수있는 십자가에서 희생당하고 말았다.

유대의 기득권층이라 할수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꾸준히 그리고 집중적으로 연합하여 예수님을 공격했고 그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예수님은 점점 더 고립되었으며 종국에는 작은 동산에서 포위당하고 말았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와 같은 유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실패라 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과 닮은 실패의 삶이 의미있다 선포하시는 것이다.

즉, 좋은 결과물이 없는 삶이며 그 과정과 고비마다 눈물과 배신의 쓰라림과 허탈감이 있다하더라도 낙심치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와 하나되어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이 비록 비참하고 쓰라리고 실패의 현장 같아 보이지만, 잊어서는 안될것이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거대한 열심이 녹아드는 발판이었음을 비로소 우리는 고백할수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그 고달픈 공생애의 순간 순간들이 없었다면 구속의 영광도 없음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고난없이 영광없음을 믿음으로 고백할진데 낙심치 말일이다.

 

하나됨과 일치가 있기에 우리의 현실은 복음이 되는 것이다.

비록 나의 삶의 현장이 고달프고 힘겹다 하더라도 그 삶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가시며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담겨 있음을 볼수있어야 한다.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 같아 보여도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힘주어 외쳐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무언가를 - 내가 깨닫지 못하지만 협력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가시는 동역의 순간임을 놓치지 않는것 !

 

이것이 우리의 고단한 삶을 지탱해주는 소망인것이다.  우리를 홀로 고아처럼 내버려 두시지 않으심에 대한 믿음의 고백 현장인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이러한 연합과 일치의 고백이 살아있을때 진정한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저 신학적 교리 설명으로 삼위의 하나되심을 아무리 설명한들, 그것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개념일뿐이다.  그러나 삼위의 하나님과 이 땅을 고단하게 살아가야 하는 나와 연합하심을 고백할때 비로서 하나됨의 역사 현장이 복음의 장이구나 확신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단하고 피곤하고 지친 그리고 때론 실패로 보이는 그 일상의 고루함이 복음이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볼때는 그저 낭비같고 꼭 저렇게 해야만 할까싶은 안타까움이 있지만, 그 너머에 진정한 실속을 차리시며 열매를 맺어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함께 하기에 이 삶이 복음인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 한마디, 한숨 한자락 그리고 몸짓 하나 하나가 복음이 되는 것이다.

 

이 복음의 개념을 조금더 이해해 보자.

이렇게 생각할수있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이 진짜로 이런 방법을 사용하셨는가?하는 점이다.  대답은 그렇게 자주 종종 역사하셨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합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세워나갈때, 이스라엘은 부족하고 완고했었다.  때때로 믿음이 너무 없어서 하나님의 뜻이 방해될때도 있었다. 그 순간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너졌을까하는 점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마구마구 하나님의 뜻이 무너지고 허무해진것 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고 한참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수있다.  일이 틀어진것 같지만, 진정으로 승리하고 실속을 차리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비록 믿음이 형편없이 부족한 이스라엘의 어떤 누구라 하더라도 연합하여 일하시는 그 열심으로 역사를 만들어 가시며, 열매를 거두시는 하나님이심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대표적으로 사사 삼손의 경우가 그러하다.

사사기에 삼손 만큼 하나님의 임재가 빈번한 경우가 없다.  다른 몇 사사들에게 겨우 한번 있을까말까한 하나님의 임재가 세번씩이나 언급되지만, 그때마다 삼손은 자기 욕심과 혈기 그리고 방탕함으로 번번히 일을 망치고 만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실속없이 실패하신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그때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대적을 혼내시고 계시며 제거하시는 결과물들이 있음을 알수있다. 즉 열심히 실속을 챙기시는 하나님이심을 그 망나니 같은 삼손과 그 절박한 상황 중에서도 볼수있는 것이다.

 

첫번째 현실을 정리하면 이렇게 요약된다.

눈앞의 현실은 막막하다.  세상의 질서와 기득권은 막강하다.  그 텃세는 심하다.  그래서 종종 너무나 빈번하게 우리의 파송받은 삶이 무기력해지며 실패를 경험하곤 한다. 예수님의 삶도 그러해 보인다. 실제 우리의 현실의 삶도 비슷하다.  때론 재미없기까지 하다. 때때론 소명에 대한 의심이 들만큼 열매가 없거나 고생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초라하기 짝이 없는 예수님의 실패의 현장을 복음이라 부른다. 그러시면서 예수님도 우리의 형편없는 삶을 보시며 괜찮다하신다.  나도 그랬는데 뭘그래?하신다. 그러면서 이 현실을 복음의 현장으로 초대하신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는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임을 선포하신다.

왜냐고 했더니, 내가 실패하고 있는 그 현장 가운데 우리와 하나 되시어 동역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분명히 열매를 거두시고 계시기 때문이라 말씀하신다.

삼위일체가 그래서 의미있고, 예수님과 하나된 우리가 그래서 의미있다 말씀이다. 왜냐면 겉으로 보기엔 실패한것 같지만, 정작 속으로 실속 차리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기회임을 잊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그래서 고백한다. 약할때 진정 강하노라고...

 

 

 

2. 두번째 그리고 세번째 "겹쳐진" 영적 현실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첫번째 현실을 다루실때는 우리 삶의 이원론적 구분을 모호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적인 삶은 육적인 차원위에 세워지는 삶임을 강조하셨다.  답답하면서도 힘겨워 보이는 육신의 고달픈 현실이 다름아닌 지극히 영적인 복음의 삶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28절부터는 다시금 그 경계를 부각시킨다. '몸과 영혼이라는 이분법에 익숙했을 제자들과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함일 것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보면 애써 육신의 삶이 곧 영적인 삶이며 복음이므로 육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보도록 방향을 힘들게 돌리셨다가억지로 돌리셨다가 곧바로 원상태로 회복하심과 같다.

 

이러한 주님의 의도는 29~31절의 참새 이야기를 통해 헤아려진다.

참새 두마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시장에서 사먹을 수있는 가장 손쉬운 먹거리였다. 두 마리의 가격으로 지불되는 한 앗사리온은 동전 중에서 가장 작고 값어치 없는 화폐 단위이었다. 지금의 가치로 평가한다면, 하루가 아니라 한 시간에도 미치지 않는 노동의 품삯에 해당한다.  또한 누가복음 12:6에서는 두 앗사리온에 다섯 마리의 참새를 구입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그 말은 대량 구입시 선뜻 덤으로 여러 마리를 끼워주기도 했다는 말일것이다.

 

즉, 참새 이야기를 통해서 주님께서 주목하는 것은 육의 현실이 복음적 가치를 가진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을 빛나게 하는 과정은 쉽지 않음에 대하여... 그리고 빛나는 가치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일련의 과정과 의식의 전환이 있어야 함에 대한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네 삶의 고달픔이 꾸준히 지속적일때 일어나는 현상을 주님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33절의 '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해 버리는 사태'이다.  '사람들 앞에서'라는 표현이 가진 충분한 위험을 주님은 알고 계신다. 눈에 띄기 쉽고 그래서 너무나 선명하게 비교 대조되며, 자신의 처지와 타인의 처지가 내면의 가치보다는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의해 순식간에 평가되고 차별당하는 현실의 무게를 예수님은 헤아리심이다.

무게가 점점 무거워질때, 언젠가 버티는 것을 중단해 버릴수밖에 없는 나약하고 제한적인 우리를 잘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새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힘겨운 현실, 육신의 고달픈 무게가 복음의 참된 현장이며 가치있는 삶임을 설득하시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힘겨워도 동기만 적절히 부여되면 견딜수있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참새 두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고,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은 시장에서 형성된 현실적 가격이다.  시장은 나름 수요와 공급에 의해(요즘과 같은 투기세력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잘 돌아간다. 당시엔 냉동 창고와 같은 저장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먹거리에 있어서는 더더욱 정직한 가격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참새는 이러한 빈민층들의 중요한 먹거리였다. 값싸게 덤까지 주는 고기는 참새밖에 없었을 것이다. 흔하고 잡기 쉬웠기 때문일것이다. 흔하긴한데 잡기 어렵다면 당연 가격은 올라갈것이지만, 참새는 흔하기도하고 잡기도 쉬운 먹거리였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이렇게 흔하고 가치없어 보이는 참새 한 마리 - 그것이 덤으로 끼워준 날개부러진 참새라 할찌라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잡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너무나 쉽게 그리고 많이 잡히는 참새를 익히 알고있는 제자들 입장에서는 다소 당황스러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다 여기는 사실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 혹은 관점을 달리한 접근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만일 주님께서 구하기 정말 어려운 상어 지너러미(삭스핀)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다면 그럴수있겠지 생각했겠지만, 참새 이야기에서는 너무나 보편적이고 잘 알고있으며 살아가면서 늘 주변에서 접하는 참새 가격과 포획의 문제였기 때문에 쉽게 수긍하기엔 너무 싱겁다는 느낌이 있었을 것이다.

 

두번째와 세번째 현실에서 주님께서 주목하시며 노리는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네 삶은 히말라야 등정 중에 겪는 어려움에 대한 논의는 극소수의 모험가 이야기이다.  사실 등산은 일년에 한번 동네 앞산에 올라갈까말까지만, 맘속으론 늘 히말라야 등반을 꿈꾼다. 그러나 이 소망은 일생에 한번 있을까말까한 일이다.

우리의 삶은 히말라야 등정을 하고 고급식당에 삭스핀요리를 즐기는 일상을 보내지 않는다.  그건 어쩌다가 특별한 날에 작심해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동네 가게나 편의점에서 쌀을 구입하고 갈치와 샴퓨를 구입하며 몇푼 되지 않는 가격에 깜짝 놀라며 두개 사려다가 하나를 빼놓고 계산하는 것이 그냥 일상의 모습이다.

 

전쟁이 나거나 어떤 특별한 사명에 목숨 걸어 영웅적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주로 영화관 스크린에서만 일어나는 그들만의 일이고, 나의 삶은 자녀의 건강과 영어 수학 국어 ... 공부와 시험에 덩달아 녹초가 되는 삶이다. 아프기라도 하면 밤새 열이 나서 콜록거리거나 몸을 긁어대는 아이와 함께 긴밤을 새우고 다음날 비몽사몽 헤롱헤롱하면서도 출근해야 하는 삶이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우리가 가장 흔히 겪고 많은 시간을 맞주하는 일상의 당연해 보이는 일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며, 그것이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길임을 들려주고픈 것이다.

 

왜 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할수밖에 업는 것일까?

 

이 말씀을 받고 있는 이들은 주님의 권능을 덧입고 소명감에 불타는 제자들이며, 주님께서 '이리떼 가운데 보낸 양'과 같이 기대를 한몸에 받는 그 사람들이... 왜 주님을 결국 부인해 버리는 것일까? 그 결과 예수님께서도 실망하셔서 심판날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휘젓고 만다는 깜짝 놀랄만한 사실에 우리는 놀랄수밖에 없지 않는가!...

 

왜 사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는가?  과연 어떤 모습의 삶이 주님을 부인하는 삶이란 것일까?  베드로처럼 세번 예수를 저주하며 부인한다는 것을 의미할까?

그렇지는 않은것 같다. 그저 당황스럽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말로 부인하며 실수했지만, 그렇다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버림을 당했는가?  오히려 회복됨으로 초대교회의 든든한 사도로써 죽기까지 충성하며 본이 되고 든든한 기둥의 역할을 감당했다.

 

인생을 살면서 겪는 뜻하지 않은 실수나 실책을 문제 삼으신다는 것은 아닌것 같다.

이러한 것이 중하다면 중하지만, 주님께서는 회개와 애통을 통해 그러한 잘못은 능히 충분히 용서해주심을 여러차례 언급하셨고 길을 열어 두셨다.  만일 그런일로 주님의 부인하심의 대상이 된다면 구원받을 인생이 없을 것이다.

 

본문의 참새 이야기가 의도하는 것은 흔하고 지속적인 일들에 반응하고 생각하며 다시한번 마음을 모아가는 일들과 관계있음이다.  즉, 일상의 삶에서 겪는 지속적인 고통과 문제들 앞에서 어떻게 주님의 파송받은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훼손당하지 않고 소명감을 회복하며 끝까지 양으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일까?  마치 끼니마다 장에 나가 참새 두마리를 한 앗사리온 사와서 털뽑고 내장 발가내어 구워먹는 일과 같은 일들은 무엇일까?

또한 그렇게 흔하고 자주 접하기 때문에 '설마 이런 일에 하나님의 섭리 역사나 큰 의미'등과 같은 뜻히 있으리라고 예상치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일들은 어떤 것들일까?

 

무엇이 우리를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으로 내몰고 있는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것같은 자녀들을 어린이집이나 누군가에게 맡기고 하루종일 정신없이 돈벌기 여념없이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이 개인적 취향일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것이 너무 무서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이 말이 가진 무서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포도청은 요즘으로 따지면 경찰청이거나 검찰청이다. 일전에 경찰청에서 편지가 날아왔다.  가슴이 뜨끔했다. 내가 뭔잘못을 했나? 혹시 또 교통위반해서 벌금내라는 것은 아닌가해서 짧은 순간이지만 겁났다. ^^*  뜯어보니 면허증 갱신 기간 안내문이어서 곧바로 대수롭지 않은듯 휙 던져버렸지만... 혹시라도 그것이 출두명령이거나 벌금고지서였다면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 무섭다. 애써 노동하지 않으면 당장 먹거리와 건강의 위협과 긴장감은 극에 다다른다.

이런 고달픈 현실은 누구나에게 적용된다.  그렇기때문에 우리의 현실은 살벌하다.  더구나 이웃이 부모를 잘만난 덕분에 혹은 직장이 번듯해서 등등의 이유로 별수고하지 않아도 잘먹고 잘사는 모습을 볼라치면, 비교에 의한 열등감이 생겨나고 경쟁과 업적을 위해 더 고달픈 삶에 몰두하게 된다.

 

누군가가 중요한 일과 바쁜 일을 구별하고 중요한 일에 투자하라고 멋진 말을 하지만, 당장 먹고 살기 바쁘고 경쟁해야 하는 입장에선 배부른 소리일뿐이다.  교회에서는 거룩하고 세상을 초월한듯 찬송하지만, 당장 뒤돌아서면 좀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준비하고 경쟁한다.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야지만 남과의 경쟁에서 한발 앞서게 되는 것이 현실이기때문이다.

 

한국과 같은 경제적으로나 정치 교육 사회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의 경쟁은 가히 무한경쟁에 가깝다.

즐겨보는 TV 프로그램 중에 '무한도전'을 웃으며 보지만, 실은 삶의 무한도전 상황에 지친 이웃을 위로하고 웃음주며 잠시라도 기쁨주기 위해 애써는 '유재석과 그의 신도들'을 보면서 맘속으로는 울때가 있다.  이렇게라도 웃지 않으면 웃을 일이 점점 사라지는 세태가 무섭다.

 

우리는 왜 주님을 부인하는가?  우리 삶에서 주님을 부인해 버리는 삶은 어떤 것일까?

 

거듭 말하지만, 단지 힘겹기 때문에 부인하는 것은 충분히 수정 가능함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기 때문에 별로 걱정할 바가 아니다.

정작 염려스러운 것은 비교와 경쟁 그리고 그 가운데서 정신없이 내몰리는 우리네 삶이 막다른 길에 내몰때이다.

힘겨워 죽을판에 하나님의 뜻은 무슨 얼어죽을 뜻...이라 속으로 외쳐대는 삶이 위험하다.  차라리 밖으로 표현하기라도 하면 낫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자세는 표현도 은밀하고 때론 표현하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인다.

 

이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한것이 28절의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이 겁나는 세상, 현실'이다.

죽는다는 것, 희생 당한다는 것, 학살 당한다는 것... 생각하기에도 끔찍하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삶이 가진 비교와 경쟁에 찌들린 삶이 가져오는 살인의 상황을 우리가 늘 겪으며 살아갈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꼭 칼로 찔러 죽여야만 죽어가는 살인의 추억이 넘실대는 핏빛 현실도 실제 상황이지만, 그보다 더 보편적인 것은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삶의 자세가 바로 주님을 부인하는 것과 관련있음을 지적하신다.

 

우리의 삶에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목구멍을 위한 비교와 경쟁 구도는 늘 불안하고 바쁘다.  그런데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먹고 살려면 당연한 몸부림이다.  만일 주님께서 이런 삶 자체를 부정하신다면 우리는 모두 산으로 들어가 자급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이리떼 가운데로 우리를 살도록 초대하셨기에 또한 그 가운데 먹고 살려면 당연히 경쟁하며 돈을 벌고 애써야 하는 삶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한 분주함 가운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애씀과 분주함이 당연한 일상으로 여김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기대와 복음의 적용 영역에서 제외되었다고 느끼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애씀과 고단한 일상의 치열한 몸짓으로 인해 혹여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갈수있는 현실을 잊어버리거나 무관심해져 버린 나의 모습이나 삶의 자세'가 문제된다는 주님의 지적을 잊어서는 안된다.

내가 잘 나가는 것이 나혼자 잘나서 그렇고 내가 즐기는데 뭔 상관이냐는 듯이 살때, 누군가는 그 경쟁에서 치이고 밀려나 비참한 심정일수있음을 의식하며 뭔가 대책을 세우는 것이 주님을 인정하며 파송받은 이땅의 제자의 삶임을 잊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32절과 33절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삶의 자세는 이러한 우리의 삶의 패튼과 상관있는 말씀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인정하는 삶으로 초대받았다면 어쩔수없는 고달픈 현실 가운데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며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백마디 고상한 방언보다 더 의미있는 복음의 삶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으리라는 산상설교 8복의 선언처럼, 내 일에 너무 바쁘고 치여서 하나님의 관심과 삶의 자세로의 초대마저도 망각하고 오직 자기 목구멍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제자들의 변절을 향한 경고의 나팔소리이다.

 

우리의 현실의 삶이 복음의 삶인 이유가 한가지 더해졌다. 실패처럼 보이는 삶의 현실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일하시는 순간이므로 우리네 삶의 현실이 복음이었던 것처럼, 고달프고 정신없이 바쁜 포도청같은 목구멍을 위한 내 삶의 일상을 복음의 현장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일한 현실을 살아가는 불쌍한 나그네 인생들을 '내 코가 석자임에도 불구하고' 돌아보며 섬기며 긍휼히 여기는 것이 복음의 제대로된 응답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주님을 부인하는가?  우리 삶에서 주님을 부인해 버리는 삶은 어떤 것일까?

 

두번째와 세번째 현실중에서 '겹쳐진 영적 현실'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가치를 발한다.

겹쳐진 영적 현실은 '참새 이야기'의 후반부에 있다.  29~31절(...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에서 보여지는 싱거워 보이는 이야기에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참새 장사꾼들이 밖에 나가기만하면 너무나 흔하디 흔한 참새를, 별다른 고생없이 너무나 손쉬운 방법으로 그물에 빡빡할정도로 포획해 오는 현실을 보면서... 여기에 뭔 하나님의 일일이 간섭하심과 허락하심이 있단말인가...싶어 허탈한 맘...

그러면서 우리들은 그렇게 잡혀오는 많은 참새들보다 더 귀하여서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었다는 위로의 말씀이 엄청난 힘과 격려로 다가오는가 말이다.  허무개그처럼 '오는데요!'하면 할말없지만, 기실 이 말씀에 큰 위로받고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멋진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지 않은것을 보면 별로 절실히 다가오는 것 같지 않다.  나를 포함해서...

 

이것과 상관해서 우리의 삶의 현실을 둘러보자.

일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흔하게 경험하는 경쟁과 비교 그곳에서 빚어지는 갈등... 너무 흔하지 않는가? 사실 너무 흔하다.

한해동안 이러한 비교와 갈등에 고민하다가 죽어간 이웃의 숫자가 몇명쯤인지 감이 잡히고 그들의 안타까운 죽음이 가슴을 아프게 하는가하면 사실 그렇지가 않다.  누가 얼마나 죽어가는지 별로 관심도 없고, 마음이 그렇게까지 아프지도 않다. 그저 내앞의 문제가 더 신경쓰이고 고달플뿐이지 오지랖넓게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유명한 연예인이나 다소 지명도 있는 경제인이나 정치인이 자살했다하면 잠시 관심을 기울이며 들끊다가도 이내 곧 잊혀진다.  다른 수많은 죽음들이 타살이 아닌 이상, 흔한 한줄자리 기사도 되지 않는 무관심속에 묻힌다.  지난해, 2007년 대한민국 총 사망자는 244,874명이었다. 하루 평균 671명이 세상을 달리한다. 그중에서 자살자의 수는 12,174명이었다. 하루 평균 33명이 자살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올해 통계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진것과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로 더 많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너무나 흔하고 종종 경험하는 홍수같은 일들이 매번 반복되면서 생기는 중요한 영적 현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내 삶을 통한 주님을 인정하고 불인정하는 것과 관련이있는 중요한 태도로서의 '무관심, 무감각'임을 보았다.  사실상,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 앞에 무관심 할수있는 강심장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이 땅의 영적 현실로서, 너무나 흔하고 자주 발생하게 되면 그것이 무덤덤하게 그리고 제대로된 가치를 망각한채 그저 막 대하게 되는 위험이 바로 이것이다.  내 삶이 주님의 복음이 되는 삶에 있어 치명적이라 할수있는 영적 현실임을 앞서 확인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관심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현실 속에서 분명한 삶의 열매로 우리를 판단하실 주님을 잊지 않는 것이 그분을 부인하지 않는 삶이다.  즉, 우리의 일상의 삶 가운데 무관심과 이기심으로 무장되는 육의 옷을 벗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성령으로 옷입기를 잊지 않는 믿음의 자세가 '겹쳐진 영적 현실'을 살아가는 태도라는 것이다.

 

경쟁에서 밀려났다해서 무가치하고 끝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유효하며 가치있는 삶임을 확인하며 서로 더불어 불쌍히 여기며 살아가며 나누며 살아가는 삶... 내 삶의 열매는 이땅의 비교와 경쟁에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교와 경쟁의 결과에 상관없이 내가 자리한 곳에서 서로 불쌍히 여기며 돕고 섬기며 위로하는 삶의 열매를 맺어가는 것, 그것이 주님을 인정하는 믿음의 삶임을 고백하며 용기를 잃지 않는것, 낙심하지 않는 삶으로의 초대인 것이다.

 

죽음으로 내몰리는 '내 뜻대로 그리고 기도하고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그래도 나를 가치있어 하시고 나를 향한 기대와 뜻이 있음을 알아, 예수님께서 맺기를 원하시는 열매 - 낙심하지 않고 살아있는것, 서로 불쌍히 여기며 돕고 섬기는 것, 세상의 비교와 경쟁에 의한 열매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름의 소명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복음의 삶임에 주목하기를 원하심이다.

 

이것은 세상의 가치 기준에 내가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 기준에 의해 움직이며 살아가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분명한 정체성, 부름의 소명을 잃지 않고 견디며 살것을 원하시는 복음의 삶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복음의 삶을 살다 가셨기 때문이다. 비록 세상 사람들 보기엔 형편없는 실패처럼, 남은 것 하나없는 비참한 삶처럼 보인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의 열매를 위한 거룩한 복음의 삶이었음을 우리 모두가 고백하기 때문이다.

 

두번째와 세번째의 겹쳐진 현실을 요약한다면...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두번째 현실이 이와같은 극심한 낙심과 부정적인 감정이 넘실댈수있는 곳임과 그곳에서 길을 잃어버림으로 주님을 부인해 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이 닥칠수있음을 경고하심이다. 

예수님을 바알세불이라 왜곡하며 핍박함으로 우리의 현실이 마냥 고달프기만한 의미없는 세상같이 몰고가는 현실 속에서 정작 이러한 무기력하고 재미없는 현실의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연합하시어 복음의 현장되게 하시는 주님의 열심이 녹아나는 복음의 현장임을 들려주셨다. 또한 이어서 그러한 고달픈 경쟁과 이기심 속에 지내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중요한 복음의 현실과 현장이 더이상 의미없어 보이는 영적 무감각에 빠져든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도 이원론적 삶(선데이크리스챤 같은)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몸과 영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몸을 죽이는 두려운 현실의 삶이 복음 자체이며 복음의 현장임을 다시금 강조하신다.  잊어버릴만한 충분한 이유와 연약함이 있지만, 다시금 그 흔하디 흔한 참새 한마리(덤으로 얹어줬을수도 있는 그 참새 한마리)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미물일찐데, 하물려 머리털까지 다 센바된 너희들일까보냐...하시는 것이다.

 

이리떼 가운데로 파송받은 어린양과 같은 제자들과 우리들의 현실은 이처럼 만만치 않은 복음의 현장이다.

이미 이루셨지만 아직 남겨두신 주님의 뜻과 소명을 향한 부르심은 세상끝날까지 여전히 유효함을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이 땅에 살아가지만 하늘에 속한  자녀임을 다시금 헤아리며 집을 나서고 교회를 나서기를... 소망한다. 힘겨울 것이 뻔한 일상이 충분히 예상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이 비집고 들어오는 삶의 현장임을 애써 고백하며 자살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또 하루를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기!!!